회장 후보간의 과열경쟁은 한인회 이미지에 큰 흠집을 남기곤 했다. 1987년 18대 회장선거 투표장인 아드모어 공원 체육관 앞에 LAPD 경관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1987년 7월1일 실시된 18대 회장 선거에서는 김완흠씨와 17대에 이어 재도전한 윤창기씨가 맞붙었다.
그러나 양측의 선거열기가 너무 뜨거워지면서 유세과정에서부터 사사건건 마찰이 발생하더니, 결국 개표장에 경찰관들이 출동하는 소란이 벌어졌다. 또 당시 선관위원장을 맡았던 변창환씨는 후보 참모에게 멱살을 잡히고, 개표장 출입을 저지당하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17대 직접선거의 과열로 인한 한인사회 분열을 막기 위해 1989년 7월 간접선거로 치러진 19대 회장선거에서는 제너럴 머니오더사를 운영했던 황제선씨가 김영태 후보를 누르고 19대 회장에 오른다.(황 회장은 회장 당선 뒤 김씨를 이사장으로 기용했다).
잇딴 추태 법정싸움… 폭동 땐 기능 못해
이기명·황제선·김영태·장성길씨 등
한국진출 대부분 뜻 못 이루고 돌아와
24대 서영석씨 동포특례법 제정에 큰몫
전남 영광 출신인 황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주지역 최측근 인사로 헌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 한인사회에서도 의리있고 경우가 바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어째든 그같은 공로로 DJ가 집권하자 귀국해 모 기업 감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정권 교체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특히 황씨는 자서전 발간을 준비했으나 DJ 관련 등 민감한 부분 때문에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황제선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한국으로 들어가면서 후임회장을 놓고 한인회는 또다시 소송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 해 5월15일 한인회관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이종원씨를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지만, 2주 뒤 선관위는 김영태씨를 회장으로 선출해 2명의 한인회장이 존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법정으로 끌고간 이 사태는 2년만인 1992년 6월 김영태씨가 승소하며 그해 10월1일 21대 회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1992년은 한인 이민사의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4.29폭동이 발생했던 해로, 한인회는 정작 기능과 역할이 절실했던 시점에 제 몫을 하지 못했다.
김영태씨도 자민련 소속으로 한국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김종필 총재의 최측근이었던 김용채씨로부터 “공천받도록 해줄테니 한번 도전해 봐라”는 말에 용기를 얻은 김영태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부동산 일부를 매각한 돈으로 1994년부터 본격적인 도전에 나선다.
1996년 전국구 16번을 배정받았지만 14번에서 끊기는 바람에 한차례 실패했고, 2000년에는 강원도 철원지역구를 공천받고 금배지를 달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그러나 당선이 유력시 되던 상황에서 난데없이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발표가 나오자 판세는 순식간에 뒤집혀 또다시 낙선의 분루를 삼켜야 했다.
결국 김씨는 모든 꿈을 버리고 LA로 돌아왔으며, 현재는 부동산 매입 등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김씨는 “막상 LA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면서 “죽었다가 살아난 셈”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또 “한국정치는 학연과 혈연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는데다 해외동포에 대한 유권자들의 민심이 매우 배타적임을 명심해야 한다”며 “내 인생에서 몇 번 잘못 선택한 것 중 하나가 국회의원 선거 출마였다”고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기도 했다.
1994년 장성길 22대 회장을 시작으로 LA한인회는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장 회장도 김영태 전임회장에 이어 한국 정치에 입문, 한나라당 소속으로 DJ의 아성 호남지역에 지역구를 공천받아 출마했지만, 역시 무기력하게 쓴 맛을 봤다.
이후 폭동 당시 한인사회 안전을 위해 활발한 노력을 기울였던 조인하씨가 1996년 23대 회장에 올랐고, 1998년에는 서영석씨가 24대 회장에 무투표 당선됐다. 당시 정인철(26대 이사장)씨가 출마를 고려했다가 포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 회장은 재외동포 특례법 제정에 올인했다. 당초 이중국적 허용 및 동포청 신설을 목표로 김대중 대통령과 박상천 당시 법무부 장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진행되던 노력은 외교통상부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특례법으로 모양새가 바뀐 상태였다.
그런데 1998년 8월 난데없이 암초가 등장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서경석 목사가 중국 동포가 배제된 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또 법사위 의원들에게 이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시키면 차기 총선에서 대대적인 낙선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회기마감 3일 전 발생한 이 사태로 서 회장은 낮과 밤을 국제전화에 매달리며 서 목사 설득작업을 벌였고, 법사위 폐회 하루를 남겨놓고 서 회장과 서 목사는 ‘재외동포 향상협의회’를 만들어 중국 동포 지원에 나선다는 합의서 서명이라는 극적인 타결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 법안은 회기 마지막 날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 결과를 얻기까지는 서 회장을 비롯해 이세종(뉴욕), 박균희(시카고), 이정순(샌프란시스코), 조광세(샌디에고), 웬디 유(오렌지카운티), 이환수(달라스), 문홍택(DC) 등 각 지역 한인회장들의 열정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한인사회의 적극적이 지원과 성원이 가장 큰 힘이었다
서 회장은 출범 직후 여론 다양화와 장기적 안목의 세대교체 차원에서 1.5세들을 대거 이사진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1세 이사진들과의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한인회 사무국장을 맡았던 김유상씨가 사퇴하면서 다른 1.5세 이사들의 퇴진이 이어졌다.
여기서 정의식 당시 한국노인회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노인단체들을 장악하고 있던 정 회장은 한인회장 선거 때만 되면 당락에 중요한 변수를 미칠 수 있는 노인표를 앞세워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때문에 각종 행사에서 그가 한인회장보다 먼저 단상에 올라 축사를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기도 했다.
서 회장도 “당시에는 투표율이 가장 높은 연령층이 노인들이었다”면서 “‘내가 갖고 있는 표만 수만표’라는 정 회장의 말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22대부터 24대까지 단독후보 출마로 무투표 당선됐던 한인회장 선거는 2000년 25대에서 뜨거운 경선이 벌어져 하기환씨(현 코리아타운 주민의회 의장)가 스칼렛 엄(현 LA한인회 이사장), 강종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2002년 열린 26대 선거는 초반부터 잡음이 그치지 않았다.
당초 남문기씨(뉴스타 부동산 대표)와 경합을 벌일 것으로 확실시됐던 김경재씨가 돌연 사퇴를 선언하자, 한인회의 일부 이사들이 남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때마침 캐나다를 여행중이던 하기환 회장을 설득, 재출마시켰다.
선관위(위원장 이영송)는 남씨의 후보등록을 LA카운티 거주기간이 후보자격에 위배된다는 점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 결국 하 후보가 재선된다.
27대 선거는 내과의사 이용태씨가 단독 출마, 회장에 선출됐다.
이씨는 회장 임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꾸준히 한국의 한나라당을 접촉하며 정계진출을 모색하고 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문기, 김남권(당시 축제재단 이사장), 스칼렛 엄, 김기현(변호사)씨 등 4명의 후보가 출마한 28대 선거는 역대 선거중 가장 치열하고, 가장 많은 선거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됐다. 특히 정확한 액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남씨와 김남권씨가 각 100만달러의 자금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 선거에서는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돼 획기전인 선거관리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유권자 등록과 확인과정에서의 오류와 잦은 가동중단으로 오히려 불신만 가중시켰다는 비난만 불러오기도 했다.
온갖 흑색선전이 난무했던 이 선거에서 남 후보가 당선됐지만, 지나친 과열과 선거자금 투입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거세지면서 간선제 도입 필요성 논란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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