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워 힝의 마을축제. 당시의 젊은이들은 모두 가난 고향을 떠나 이민길에 올랐다.
홍콩에서 몇 시간 서쪽으로 가면 타이샨이란 도시가 있다. 남지나해에 면한 이 도시를 중심으로 가난한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워 힝이란 마을이다. 황폐하게 쇠락해가는 이 손 바닥만한 마을의 별명은 롭 참 키 마을, 바로 로스앤젤레스 마을이다.
마을사람 모두 LA에 친척 있어 생긴 별명
미국 친척들 고향방문 물결로 한때 흥청
이민 1세대 세상 떠나면서 돈줄 마르기 시작
70년 전 지지리도 못살던 이 마을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났다.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에서 행운을 잡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다른 곳이 LA의 힐스트릿이나 브로드웨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이다.
그곳에서 요리사로, 웨이터로 취직을 하고, 샌개브리얼 밸리에서 식당을 열고 하며 자리를 잡았고, 그다음 세대인 자녀들은 엔지니어도 되고 시의원도 되며 미국인으로 뿌리를 내렸다. 고향 워 힝은 이제 그들의 삶에서 까마득한 과거인데 문제는 워 힝이다.
타이샨을 둘러싼 많은 마을들처럼 워 힝 역시 뼈 빠지게 밭 갈며 살던 곤궁한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는 미국 등 해외에서 성공한 친척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흥청대던 시절이 있었다. 잘 사는 화교들이 고향 발전을 위해 기부금을 내서 도로도 건설하고, 학교도 지으며 동네가 활기찼었다.
문제는 그렇게 외국에서 오는 돈에만 의존하다보니 마을이 자생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고령화한 1세대들이 LA의 차이나타운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와 힝의 돈줄도 말라버렸다. 아직도 우물에서 물 깃고 나무 때서 밥하는 이 깡촌의 40명 마을사람들은 앞날이 암담하기 그지없다.
중국이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농촌들이 몸살을 겪는 것은 전반적 추세이다. 적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타이샨 인근 마을의 사람들은 특히 힘들어 하는데 이유는 너무 오래도록 미국에서 오는 재정적 지원에 길이 든 탓이다. 마을 사람들 중 해외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이 없다.
타이샨 출신으로 화교 연구학자인 메이 웨이킹 교수에 의하면 타이샨 출신들은 해외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미국사회에서 이들은 가장 밑바닥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런데 막상 타이샨 일대 농촌 사람들은 미국서 친척들이 보내주는 돈에 맛이 들려서 일 안하고 게으르게 사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미국 화교들은 타이샨 수준으로는 모두 부자였고, 미국 돈으로는 얼마 안되는 액수라도 타이샨에서는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교들은 고향에 가면 누구나 영웅이다. 마을 회관마다 누가 얼마나 돈을 기부했는지 화교 기부자 명단이 대리석 판에 붙어있다. 화교들이 오랜 세월 고향과 이처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이유 중 하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 때문이었다. 두고 온 집을 틈틈이 보살펴 주고 한달에 두 번 향을 피워 조상에게 예를 갖추는 일을 동네 친척들이 대신해주었다.
1940년대 고향을 떠났던 화교들이 가장 빈번하게 고향을 찾았던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수십년 일한 후 안락한 은퇴기를 맞아 그동안 모은 돈을 고향에 가서 나눠 쓸 여유가 생긴 때였다. 당시에는 미국 화교들이 수십명씩 미니버스를 타고 단체로 고향을 찾곤 했다.
지금은 몇 달에 한번씩 오는 전화가 고작. 내용은 누구누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그 세대가 떠나고 나면 그 아래 젊은 세대들은 부모의 고향에 대해 아무런 특별한 감정이 없을 것이란 걸 워 힝 사람들은 알고 있다.
중국이 경제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1978년 이후 워 힝 주변도 변하기 시작했다. 시골길을 따라 수십개 공장들이 들어서서 제재소며 닭 농장 자리들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다. 반면 워 힝은 1902년 마을이 세워졌을 당시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변하는 게 없는 동네이다.
LA 차이나타운 타이샨 향우회 회장인 윌리엄 웡(74)씨는 매 2년마다 고향을 찾는다. 아케디아에 사는 그가 고향 워 힝을 떠나 이민길에 오른 것은 1947년, 14살 때였다. 그리고는 워 힝을 처음 다시 방문한 것은 1994년. 다 쓰러져 가는 고향집을 1만달러를 들여서 다시 지었다. 지금 워 힝에서 현대식 건물은 그의 집이 유일하다.
워 힝 향우회는 수십년전 처음 조직되었을 때 회원이 2,000명이었다. 지금은 그 절반 밖에 안된다. 나이든 세대는 차례로 죽어가고 젊은이들은 가입을 하지 않으니 회원이 줄어드는 것이다.
워 힝 마을 사람들도 점점 미국과의 유대가 약해지고 있다. 미국에서 돈을 보내주던 가까운 친척들이 세상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계 미국이민의 뿌리 - 타이샨>
화교들의 넘버 원 고향
남지나해에 면한 타이샨은 자칭 ‘화교들의 넘버 원 고향’이다. 해외로 나간 중국 화교들 중 그 지역 출신들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타이샨의 인구는 100만명. 하지만 홍콩과 미국 등 해외에 자리잡은 타이샨 출신 화교는 130만명이다. 미국에 사는 중국계중 50만명은 타이샨 후손들로 추정된다.
타이샨에서 이민 행렬이 시작된 것은 200년이 넘는다. 워낙 못사는 지역인데다 바로 앞에 남지나해가 있어서 젊은 남성들은 해외로 해외로 나갔고 그들이 많은 지역에 화교의 뿌리를 내렸다.
1980년대 타이완 출신과 홍콩 출신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미국에서 중국계는 타이샨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차이나타운에서 쓰는 중국말이 거의 타이샨 사투리였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찹수이 등 중국음식도 타이샨 화교들의 작품.
타이샨 출신 화교들은 미국의 역사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 광산에서 일하고, 철도 건설에 동원되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 까지 전국의 차이나타운을 만든 주인공들이 타이샨 출신 중국인들이었다.
이들 미국의 타이샨 출신 중국계와 홍콩의 같은 고향 화교들이 돈줄이 되어서 타이샨 일대의 병원, 학교, 노인 센터, 고속도로, 교량, 탑 등을 세웠다.
타이샨에서는 지금도 매년 8,000명 이상이 이민길에 오르는 데 대부분 미국이나 캐나다에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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