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상기<맨하탄 거주>
케네디 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대서양 하늘을 계속 ‘직선’으로 나르다 보면 도루 케네디공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직선의 연장이 동그라미로 이어짐을 확인하게 된다. 동그라미의 일부인 ‘직선’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양 믿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이런 착각을 진리인양 믿는 가치관이 인류의 비극을 자초하고 있다.
직선의 양쪽 끝이 서로 대립하며 줄다리기 하는 적대관계라면 동그라미는 양쪽 끝이 서로 만나는 화합과 평화를 상징한다. 정신과 물질,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 등 상반되는 관념은 서로 떨어져 직선의 양쪽 끝에 자리 잡는 이원론적(二元論的)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이원론적 직선의식이 플라토(Plato) 이후 서양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플라토의 이원론 주장은 서양사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기에 20세기 석학 화이트헤드(A. Whitehead)는 서양철학의 역사는 플라토의 각주(footnotes)라는 지적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에서도 아리스토틀(Aristotle)의 ‘좋은 중도’(中道· ‘Golden Mean’)라는 절충 융화의 내용이 있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유신론적(有神論的) 종교사상은 이원론적 차별성을 유별나게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이원론적 차별성은 독선적이며 비타협적 배타성을 들어내기에 전쟁의 불씨가 되어왔으니 이른바 십자군(十字軍)전쟁과 계속되는 중동(中東)사태가 그 예라 할 것이다. 우리가 플라토의 권위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힌다면 플라토 이전의 철학자 아낙스고라스(Anaxagoras·500-428B.C.)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모
든 것의 부분을 공유한다(All things have a portion of everything).” 이 세상 어느 하나 완전히 분리되어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차고 더운 것, 밝고 어둔 것, 선과 악, 성(聖)과 속(俗)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비율로 공존
(共存)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는 완전(完全)한 악인(惡人)이나 선인(善人)은 없다는 내용이다. 무차별(無差別)의 원리(原理)이다. 불륜을 범한 여인에게 아무도 돌을 못 던진다는 신약성서의 교훈에서 그런 내용을 배우게 된다.
아낙스고라스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싯달타라는 사람이 중도(中道)의 이치를 깨닫고 부처가 되었다. 싯달타는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 선과 악이라는 ‘직선’의 양극을 피하는 불선불악(不善不惡)이라는 중도행(中道行)을 실천했다. 중도사상(中道思想)의 중(中)이란 평균적의미로서의 가운데가 아니라 직선의 양극(兩極) 정(正)과 반(反)을 합(合)해 동그라미라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변증법적 의미를 지닌다. 상반되는 한쪽을 말살하고 다른 쪽 손을 들어주는 차별행위가 아니라 양쪽의 장점(長點)을 다 살리어 승화시키는 무차별 행위이다.
중국의 선불교(善佛敎)를 시작했다는 달마 대사는 양무제(梁武帝)에게 성속무차별(聖俗無差別)이라는 내용을 외쳤다(廓然無聖). 동그라미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무차별의 마음이 바로 보살 정신이다. 직선위의 물건은 조금만 흔들어도 흩어져 떨어진다. 스님들의 합장(合掌)이란 직선으로 뻗친 양쪽 손을 합치며 동그라미를 만드는 행동이다. 소녀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도 그러하다. 동그라미는 모든 존재(存在)의 원형(原型)이다. 가장 크다는 천체나 가장 작다는 원자의 윤곽은 동그라미의 닮은꼴이다. 우리 몸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피 속의 적혈구도 동그라미 형태이며 직선형이 되면 병(Sickle Cell)으로서 순환장애를 일으킨다. 생명현상이란 동그라미를 그리는 기능이다. 심장에서 내보낸 동맥의 피는 정맥의 피가 되어 도루 심장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불필요하다고 내보내는 탄산가스(惡)는 산소(善)가 되어 돌아오는 동그라미를 그린다.
자비나 사랑, 이웃사랑과 더불어 살기, 전쟁 아닌 평화공존 등의 인류 이상은 직선의식의 차별성이 아니라 포용할 수 있는 동그라미 의식에 따르는 무차별성에서만 가능하다. 동그라미로 상징될 수 있는 불교는 인류 역사상 전쟁과 무관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사실 부처나 예수는 무차별적 동그라미 정신을 실천하고 가르쳤지만 조직화된 종교 세력들은 성과 속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차별적 직선의식으로 인류를 오도하고 괴롭힌다. 그러나 서양사상도 변하기 시작해 직선의식을 깨는 소리가 19세기와 20세기에 들려오고 있다.
19세기 니체(Nietzsche)에서 싹트기 시작한 직선의식에의 회의가 20세기에 데리다(Derrida)에 의한 직선의식 해체(Deconstraction)로 구체화됨을 경험하게 된다. 20세기가 전쟁과 냉전의 시기였다면 21세기가 평화공존의 시대가 되기 위해 우리는 의식전환으로 직선을 해체하고 동그라미를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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