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커뮤니티센터 최영태 공동준비위원장(55. 뉴저지 팰팍 거주)은 누구보다 한인 커뮤니티센터에 대한 애착이 강한 인물이다.
커뮤니티센터 공동준비위원장은 그야말로 돈 생기는 자리가 아니다. 시간도 많이 소모해야 하는 일임에도 무조건 이 일은 해내야 한다며 지난해부터 커뮤니티 건립 기금모금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때문에 일터에 나오나, 집에 들어가나 상관없이 한순간도 빠짐없이 ‘커뮤니티 센터’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최 위원장의 집념은 결국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23만 달러나 모으는 신기록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건 한인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이 커뮤니티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그들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곤 한다. 누가 어디서 관심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서슴없이 달려가 그들에게 밥까지 사주며 취지를 설명하고 기금을 받아올 정도
로 커뮤니티센터 건립에 열정적이다.
누가 있어 그같이 내 돈 써가며 시간 들여 이 고생을 사서할까. 모두가 알다시피 희생적 봉사정신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4월까지는 직업이 세무사라 고객들의 세금보고를 해주다 보니 한동안 기금모금 운동이 침체돼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즌도 다 끝나 다시 기금모금 캠페인에 불을 지피고 나섰다. 덕분에 벌써 속속 이 운동에 동참하는 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플러싱 한인타운에 한인 커뮤니티센터 하나 없다는 건 좀 부끄러운 일입니다. 유대계, 중국계 말고도 하다못해 대만, 인도 같은 커뮤니티도 갖고 있는데...
최 위원장은 너무나 안타깝다는 듯 말끝을 흐린다. 커뮤니티센터는 우리 세대에서 기필코 만들어야 합니다. 이 정신이 후세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1세들이 반드시 이 일만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최 위원장은 ‘반드시 해야 된다’, ‘기필코 된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뛰고 있다고 한다. 한동안 한인들의 무관심으로 정체기에 있던 이 운동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바로 그의 인생의 동반자 수지(48)씨 덕분이었다. 수지씨는 그러잖아도 최 위원장의 인생에서 구세주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를 1970년도까지 다니다 중병에 걸려 30세를 못 넘긴다고 할 정도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을 때 최 위원장은 전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왔다. 그 당시 어찌나 건강이 나빴는지 약을 하루에 20알씩이나 먹을 정도였으나 수지씨를 만나 결혼하고부터 몸이 기적처럼 회복됐다.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건강하게 살고 있다. 이것은 모두 아내 수지씨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었다.
그런 아내가 지난달 한인들의 커뮤니티 기금모금 행렬이 뜸해지자 안타까운 마음에 한달 간 번 돈 3만 달러를 선뜻 내놓은 것이다. 한인사회에서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의 뜨거운 마음은 반드시 한인사회를 움직여 커뮤니티 센터 건립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최 위원장은 78년 맨하탄에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했으나 1년 동안 고객이 없어 혼자 일하다 처음 직원을 구했다. 그 때 채용한 첫 사원이 바로 수지씨다. 이들은 이렇게 만난 지 5개월만에 결혼에 골인, 오늘날까지 주위에서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다툼 한번 없이 금실 좋은 부부로 살고 있다.
최 위원장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대학을 다니다 뉴욕에 와 자신을 만나 지금까지 오손도손 살아온 부인을 평생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현모양처로서 수지씨가 집안을 잘 보살펴 온데다 직장에 다니며 집안 경제에도 도움을 주고 있어 이래저래 부인이 고맙기만 하다는 것.
최 위원장은 73년 퀸즈 플러싱에서 살면서 처음 맨하탄 지역을 오가는 택시기사를 1년간 했다. 이후 일본 공인 회계사 사무실에서 3년간 근무하다 77년 세무사 시험에 합격,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최 위원장은 아내와 결혼한 후 83년 스태튼 아일랜드에 집을 마련, 4년간 살다 시골생활을 하기 위해 87년 뉴저지 오렌지 카운티 몬로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곰도 두 번이나 보고 닭도 키우면서 왕복 4시간씩 기차를 타고 뉴욕의 사무실을 오고 갔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
그런 최 위원장이 완전 뉴요커가 된 것은 지난 2000년. 당시 자신의 사무실에서 회계학을 공부하던 한인회 사무총장의 권유로 뉴욕의 한인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이미 몬로에서 살면서 포킵시, 뉴버그, 몬로 지역 한인 1,000세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허드슨벨리 한인회 제5, 6대 회장으로 93년부터 2년간 단체활동을 시작한 바 있다.
이때 최 위원장은 한인회장에 출마키로 마음을 굳히고 선거운동에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집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할 수 없이 선거운동 기간인 3개월간 뉴저지 팰팍으로 거처를 옮기고 혼자서 기거하며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선거에서 그는 비록 낙선했지만 이를 계기로 뉴요커가 되어 뉴욕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최 위원장 하면 특별히 뉴요커들에게 기억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가 ‘내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하의 간증서를 발간, 당시 발행한 9,000부를 모두 판매함으로써 세간의 관심과 화제를 불러모았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가 사대부고 재학시절 무신론자일 때 한 교사로부터 ‘근심, 걱정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을 들었고 어느 날 자신이 실제로 학교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이 기도가 기적같이 이루어져 그때부터 체험적인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시련과 고통과 질병을 줌으로써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고 그를 믿고 찾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을 내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너는 나를 어떻게 해서 만났느냐는 소리에 다시 깨닫고 주위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간증하며 기도하라고.
처음에 한달 간은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던지 심지어 버스에서 ‘여기에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하며 대중을 향해 간증하기도 했다는 것.
이 때부터 그는 겁쟁이가 아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으로 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단체활동에 적극 뛰어들어 지금까지 5년째 뿌리교육 재단 총무, 평통 9기 간사, 10기 감사, 뉴욕한인회 회관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도 기독실업인협회 CBMC 제4대 회장과 한인 커뮤니티 센터 공동위원장으로 활발하게 뛰고 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지만 아내 수지씨의 말없는 내조와 보살핌이 크다.
수지씨는 현재 뉴저지 버겐 카운티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들이 고교 재학중일 때는 파타임으로 조금씩 일을 했으나 지금은 부동산 협회로부터 매년 상을 탈만큼 적극성을 띠고 있다. 2002년에는 5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액을 올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브론즈 상을 탔고, 2003년에는 7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 실버상, 2004년에도 1,500만달러 이상
의 매출액에 거의 도달, 골드 상은 무난히 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모두 최 위원장과 수지씨 부부의 찰떡 궁합과 집안이 잘 되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가화만사성의 원칙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슬하에는 어카운팅을 공부한 큰아들 재훈(23. 미국명 제퍼슨)군과 마켓팅을 전공한 딸 폴라(21)양이 있다.
<여주영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