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파란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수연의 차를 받았다. 고개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던 수연의 몸이 앞으로 튕겨나가 머리가 앞 유리창에 닿을 뻔 했다. 앞 유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와이퍼가 천천히 닦아주고 있다. 장마철이 지난 시기에 웬 비까지 뿌리고 있을까. 첫 출근하는 날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얼굴화장도 평소보다 신경을 쓰며 입술 색깔도 이것저것 발라 보았다. 거금을 투자해서 장만한 옷을 입고 솜털 같은 기분으로 한껏 부풀리고 나왔다. 그런데 누가 뒤에서 차를 받았다.
"첫날부터 더럽게 재수 없네. 어떤 인간이야."
수연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눈깔을 어디다 두고 운전을 하느냐.’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뒤차는 고급 승용차였다. 운전하던 사람은 벌써 자기 차 앞까지 와 있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영어가 더 잘된다고 했다. 그러나 수연의 입에선 한국말이 툭 튀어 나왔다.
"뭐야! 아침부터 기분 더럽게 꾸중 물 입히네."
"미안합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
남자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수연은 한국말을 듣고 힐끗 쳐다본다.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수연은 자기 차를 살피고 손으로 범퍼가 어디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고 쓰윽 만져보았다. 차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누구인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옛날 본 어떤 외국 영화 속의 배우 같았다. 남자의 외모에 노처녀의 마음이 봄기운에 활짝 핀 목련화처럼 변하면서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차는 아무렇지 않네요. 운전 좀 잘 하세요."
"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주세요"
남자는 명함 한 장을 내어 밀었다. 남자의 외모에 노처녀의 히스테리가 발동해 확 낚아채듯이 받아들고 차에 올라탔다. 빽 속에 명함을 넣고 차를 몰았다. 시계를 본다. 시간은 좀 여유가 있었다.
수연은 미국 들어 온지 3년이 되었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서 전문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을 했으나 전반적인 불경기로 회사가 문을 닫고 어머니와 둘이 살다 미국으로 들어왔다.
수연은 지금 30이 넘어간 노처녀다. 미국에 오면 제대로 된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맞선 한번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중매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중매가 들어오는 것은 영주권이 없는 사람과 반 홀아비들이었다.
수연이한테 처녀란 이름은 클레오파트라 코만큼이나 자존심을 높여주고 있었다. 혼자 늙어 죽어도 그런 곳으로 시집 안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도, 오빠도 이젠 수연의 결혼은 포기하고 있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재미있게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가면 젊음이 아까워 어쩔까. 저렇게 익은 감을 고른다고 하다 설익은 감을 잡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뒤에서 걱정과 흉을 보고 있었다. 수연의 결혼 상대는 첫째가 미혼자여야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대학 나와야 했으며, 일년에 한 두 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남자고 외모도 있어야만 했다. 한 여자를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남자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성으로 생각하는 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을 수연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세말로 노처녀에다 공순이한테 누가 장가를 오려고 할까.
몇 개월 전 한 아파트에 있는 숙이 엄마가 자기 직장으로 옮겨보라는 말을 했다. 그곳은 수연이 받고 있는 시간당 돈보다 높았다. 일도 쉬우면서 기술을 요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기술을 배워 큰 미국회사로 간다고 했다. 무엇보다 수연의 마음을 끈 것은 사장이 아직 총각이니 인연이 있을지 누가 알아? 하는 말이었다.
3주전 그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지난주 면담을 하고 오늘 첫 출근이다. 공장장의 설명을 듣고 지정해준 테이블에서 일을 시작했다. 큰 건물 안에 여기저기 방들이 있었다. 수연이 일할 곳에는 옆 테이블과 거리가 멀었다. 저쪽에선 아줌마들의 뜨거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수연은 그런 이야기가 여기서는 없을 같아 섭섭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뒤에서 두 남자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 새 사람이 온다고 했죠?"
"네, 사장님. 저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시키시오. 아주 세밀한 것이니까요."
"이분입니다. 김 수연씨."
수연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벅 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앗!’ 가벼운 비명과 함께 수연의 손이 입을 가렸다. 사장의 얼굴은 길에서 본 표정보다 맑고 환해 보였다.
"다시 만났군요. 우리 서로 열심히 잘해 보십시다."
수연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쩔쩔 매는 순간 수연의 귓불이 붉어지고 머리가 띵하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사장은 저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다. 사장이 수연을 바라보던 눈빛이 무심한 듯 하면서 매혹적이고 강력한 흡입력이었다. 수연은 그 눈빛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 우리 서로 열심히 잘해 봐야죠.’ 오늘 하루는 희망의 첫날, 첫 출발이라고 수연은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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