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새들의 세상이다. 모든 나무에서 모든 새들이 운다. 나무마다 색이 다르듯 새들마다 소리의 음색이 다르다. 그 각양의 소리들로 새벽을 두드린다. 오늘 새벽에 교회의 문을 열자 짙은 가스냄새가 확 몰려왔다. "아차!" 하고 부엌으로 가 봤더니 가스 스토브가 켜져 있었다. 밤새 가스가 새나왔을 것이다. 아래 위층의 모든 문들을 다 열어제쳤다. 예배당의 창문들도 다 연 채로 새벽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모든 창문들마다 새소리가 몰려 들어와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거대한 비행기들의 소음을 막기 위해 비행장에서 설치해준 이중창문이 닫혀있을 때는 전혀 들려오지 않던 그 새소리가 오늘 새벽만큼은 마음껏 예배당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직은 꽤 찬 기운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봄인지라 새벽공기도 신선하고 좋았지만 새소리는 더욱 좋았다. 내가 소리내어 기도하기보다는 차라리 새소리 안에 가만히 잠겨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시끄럽지만 시끄러운 것만은 아니다. 여러 마리 새들의 소리가 분주하게 얽히면서 무질서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화음이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새소리에서는 생명의 활력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들의 신선한 부산스러움.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는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나게 했다.
그 날 새벽도 그랬을까. 이렇게 부산스럽게 새들이 노래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일이 막 지난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그 때도 그 동산의 새들이 부산함으로 생명을 노래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에 압도당하여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이 감격으로 바뀌고 탄식이 탄성으로 바뀔 때 새들은 더욱 충만한 생명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유사이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보다 더 절대적인 명제는 없었다. 갈퀴를 휘날리고 지축을 박차면서 산야를 질주하는 말이지만 바닷가에 도달해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는 것처럼 꿈과 사랑, 야망과 성취, 실패와 좌절, 환희와 슬픔, 그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나의 달음질이 진정 여기까지인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말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바라본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 아무도 보고 와서 들려주는 사람도 없는 곳.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생각하고 싶지 않는 곳.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실존이기에 이 명제 앞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들의 순례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순례자들의 모색에 대해서 부활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명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무슨 차이를 지니는지 몰랐던 혼돈과 갈등의 시기가 나에게 있었다. 하루를 산다고 말하는 것과 하루를 죽어간다고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정확한 표현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 죽음을 잘 마감하기 위해서 죽어 가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어느 날 밥을 먹다가 서러워졌다. 밥그릇에서 가냘픈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내 입으로 가지고 가는 내 손목이 무척 서러워 보였다. 밥을 먹다가 울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 같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살기 위해서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의미 없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밥 먹는 것도 노동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 그 노동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팠다. 밥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더 서러웠다. 밥 먹는 것이 서러울진대 이 세상에 서럽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 나에게 세상은 끝이 안 보이는 굴속 같았다. 산다는 것은 그 굴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하면서.
그 날 새벽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진 무덤을 찾았을 때 막달라 마리아의 심정도 어두운 굴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부산한 생명의 새소리가 들려왔을 것이고 그 소리들 너머에서 부활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 음성은 무덤을 뚫고 나온 소리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죽음을 완전히 지나고 나서 다시 되돌아오는 소리였다. 나에게 어느 날 그 음성이 들렸을 때 나는 알았다. 더 이상 내가 지나는 세상이 굴속 같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굴이 아니라 터널이었다. 입구도 같고 지나는 과정은 다 똑같을지 몰라도 그 끝은 전혀 달랐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끝없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빛이 이제는 이곳을 향해 그 빛을 반사해주었고 지금 내가 있는 곳까지 밝아지는 것을 알았다. 난 요즘 밥 먹는 것을 무척 즐긴다.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동안에는 누가 실수로 가스 스토브를 켜놓지 않더라도 새벽 창을 열어놓고 기도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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