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는 시카고에서 제일 오래된 친목 단체이다. 서독 광부 출신들의 모임이지만, 실은 이들은 진짜 광부가 아니다. 60년대 한국 경제가 어려울 당시 취직하기가 힘들어서 택한 것이 서독 광부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첫 대규모 해외 인력 송출 실험 케이스였으며, 대부분이 학사 광부로서 이들이 ‘막장’에서 뿌린 피와 땀으로 얻은 달러는 한국 경제 건설에 밑거름이 됐으며, 이를 계기로 월남, 중동, 미주 땅에 본격적인 진출을 하게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거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은 전우애 보다 진한 인간적인 유대로 상부상조하면서 이민사회 초석을 마련하고 활력을 불어 넣었다. 종래 유학생 위주의 한인사회는 이들 ‘가짜 광부’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면모로 변신하게된다. 이들은 선구자적 정신을 갖고 독일로 떠났으며, 미국으로 들어와 한인타운을 건설할 때도 개척자였다. 이민 초창기 이들은 용감하게 사업을 시작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이웃사랑에 앞장섰으니 그대 이름은 시카고의 개척자다. 본보는 얼마 전 고바우 식당에서 김재휘 동우회장을 비롯, 전임 회장 밑 임원 9명과 만나 인터뷰를 했다. (편집자주)
■해외 인력 진출 길 터
1963년 12월5일, 247명의 한국인이 루프트한자 전세기에 실려 서독 뒤셀돌프 공항에 도착했다. 단군이래 한국인의 첫 해외 인력 수출이라는 서독 광부들. 말이 광부이지 이들은 거의가 다 ‘가짜 광부’였다. 이들 중 석탄공사 출신의 진짜 광부는 60명쯤 섞였다. 당시 한국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이들이 대거 몰렸다. 이때 한국 간호원들도 서독 병원으로 많이 와서 취업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 이들을 격려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노동기간이 끝나면 귀국해야 되는 것이 계약 원칙이었으나, 소수는 그곳서 결혼해서 정착한 사람도 있고, 상당수가 귀국 않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건너와 새 삶을 꾸몄다.
이들은 함본, 아헨, 에센, 크로크너 등 4개 지역으로 배치되었으며 여러 인종이 막장에서 일하다보니 지하 싸움도 종종 일어났다. LA에서 봉제업으로 성공한 안동해씨가 터어키인에게 맞아 쓰러진 일이 발생했는데, 현장에 있던 김창범씨가 “한국인이 억울하게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한국인 200명을 동원, 보복을 했다. 이 집단 패싸움으로 주모자 6명이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는 벌을 받았다. 또 이들에게 생전 처음 들어간 막장일은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다. 지하 1천5백 미터에서 석탄을 캐다보면 땀이 하도 많이 나서 신고 있는 장화가 질퍽 질픽 거렸고 작업 중 2갤런의 물을 다 마셔도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임회장 이영수씨는 “성경에서 말하는 출애급과 같다.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기 위한 40년의 광야와 같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은상기씨 제일 먼저 정착
시카고에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은상기씨로 알려졌다. 은씨는 광부 중 영어 잘 하는 사람으로 통했다. 락포드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다가 현재 애틀란타에 살고 있다. 그 후 몇 달 간격으로 연줄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우회의 전신이라면 보통 우거지회를 말한다. 신길균씨를 비롯, 이원우, 박정규, 오영택, 전병기, 박봉조, 이호중, 송길용씨 등이 멤버였다. 이들은 체육대회 등 한인사회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에센 탄광에서 김용섭씨를 중심으로 형제애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오성회를 조직하여 지금도 만나고 있다. 이들의 끈끈함은 전우애보다도 강했다. 작업 중 갑자기 굴이 무너져 사고 사를 당하거나 몸이 약해 병으로 죽는 일이 생기면 서로 부둥켜안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심전심의 동우회 탄생
“69년 독일서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친구가 절대 독일서 왔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 에요, 유학생들 앞에서 광부출신이라면 괄시받는다고 그래요. 그래 제가 언젠가는 알려 질 사실을 숨겨서는 무엇 하느냐? 그러면 약한 사람끼리 모여 단결하자.” 이렇게 해서 태동한 것이 동우회였다.
73년 친목도모, 상부상조, 재미한인사회 발전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5장 19조로 된 정관을 마련 한 후 138명의 등록회원을 갖고 동우회가 창립되었다.
동우 회원들은 먼저 온 이민 자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인 비즈니스에 뛰어 들었다. 최초의 한인타운이었던 클락가를 중심으로 박영기의 아리랑 그로서리, 유영선의 코리아 팜, 허남춘의 한양수퍼, 안동순의 서울 여행사, 청소업은 김창범이 시작해 정지선, 송인섭등으로 이어 졌다. 신길균은 로이드 신 화랑을 오픈, 문화사업에 종사하며, 최창해, 고성목, 홍영일, 이명갑은 태권도장을 운영했다. 권택균은 철강 제조업계에 뛰어 들었고, 이긍구와 최영식은 최초의 한국계 은행이었던 메이훼어 은행의 이사를 역임했다.
■이민교회 설립 앞장
이들은 ‘한국’이란 이름이 붙은 일에는 대소사를 막론하고 열심을 보였다. 동우회원들은 이 지역 초창기 이민교회를 세우는 데 공헌이 컸다. 중앙교회 안동순 장로, 은상기, 최창해. 제일교회 김용배 장로, 김희배. 개혁교회 유덕준 장로, 강호진, 김석준. 복음교회 설중섭 등등. 또 신길균, 박상열, 최명상, 박정규, 이원우, 배순기, 전병기 등이 중심이 되어 미국 신부를 초청하여 미사를 보기 시작한 것이 훗날 한국 천주교회의 기반이 되었다.
동우회는 김희배, 김창범 등 2명의 시카고 한인회장을 배출하는 등 이 지역 한인 사회에서 이 단체만큼 큰 일을 한 단체도 없을 것이다.
동우 회원들은 이제 은퇴 연령이다. 이들은 일찍이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고 고통을 극복한 정신 때문에 가족과 이웃사랑에 남다르다. 10여명의 박사를 배출한 ‘동우가족’은 수 십명의 2세 변호사와 의사를 길러냈다. 전임회장 이었던 신길균씨는 “가정에 충실하고 열심히 살았다. 이민 선구자로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도 많고, 이제 각자 건강에 조심하면서 노후 대책에 신경을 쓰자. 경조사를 위해 유기적 유대를 갖고, 은퇴 마을 같은 것도 생각하자.” 신씨의 말이 동우회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다.
육길원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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