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3·1 합창단원 80여명이 84년부터 20년 가까이 매월 1일 어김없이 파고다 공원 손병희 선생 동상 앞에서 “온 겨레의 노래"와 “용진가" 등을 부르고 있다. 평균 연령이 60세요, 최고령자는 72세라 한다.
왜 파고다 공원이고, 손병희 선생 동상 앞인가? 3·1 운동을 일으킨 진원지가 파고다 공원(탑골 공원)이요, 민족대표 33명 중 총대표가 손병희 선생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1910)한 이후 경찰과 헌병을 앞세운 조선총독부는 우선 무단정치(武斷政治)의 일환으로 하수인격인 동양척식회사로 하여금 “토지신고제"를 공고(公告), 미처 등기를 못한 논과 밭, 임야 등 백만 정보(245만 에이커)를 불법 수탈하였다.
하루아침에 땅을 빼 앗긴 농민들은 남부여대 만주 중국으로 50만명, 북간도로 30만명이 유랑(流浪))의 길을 떠났고, 게다가 고종이 급서(1852-1919 1/22)하자 일본인 시해설이 유포되어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때 마침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가 국내에 유포, 겨레의 독립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기회를 보던 중 고종의 인산(因山-國葬)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것을 예측하고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에 앞서 해외에서는 상해에서 여운형 김규식, 미국에서 안창호 이승만, 북간도에서 이동휘 등이 한국의 독립을 요로에 호소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도꾜(동경)에서는 김도연 백관수 등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간다꾸에 있는 조선YMCA회관에서 학우회 총회라는 위장 이름하에 재일 유학생 600여명이 모여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이것을 “2·8 독립선언"이라 하며 기미독립선언에 앞선 것이다.
손병희(1861-1922) 선생은 일찍이 동학에 입교, 1894년 동학혁명 당시 10만 신도를 규합하여 관군과 싸웠으며, 1919년 기독교대표(이승훈), 불교대표(한용운)와 손을 잡고 밀회를 거듭,「독립선언서」를 육당 최남선에게 작성케하고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3월 1일 오후 2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전화로 일본 총독에게 우리 겨레의 결의를 알렸다.
이에 앞서 탑골공원에는 아침부터 5, 6천명의 학생이 모여들어 3월 1일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소리가 울리자 배제학당 학생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들고 밀 물같은 독립만세를 수도 없이 연창, 지축을 흔들었다.
이들이 독립가를 부르며 시가지로 나서자 수만 군중이 시위행진에 가담하였고,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를 무렵에는 온 서울 장안이 흥분된 궁중과 만세 소리로 물끓듯하였다.
그 당시 대중이 불렀던 독립가는 이러했다.『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독립성, 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 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살았고나 살았고나 이 한소리에, <후렴> 만세 만세 독립만세, 만세 만세 조선 만만세.』
이들 비폭력 무저항의 시위 대열이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총독부에 이르자 일본군인과 기마경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해 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전국적으로 퍼진 3·1 독립운동은 상인들의 철시, 일제상품 불매운동, 학생들의 등교거부, 직공들의 파업 등으로 이어지고,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이 시위에 가담, 그 중 4만여명이 피검, 6,700여명이 사망, 14,4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우리의 조부, 증조부 누군가도 분명히 이 대열에 일원이였음을 생각케 하는 엄청난 수치이다.
16세에 산화한 순국처녀 유관순의 시신 없는 초혼묘(招魂墓)가 충남 청원군 비봉에, 일본헌병에 의해 불에 타 죽은 23명의 초혼패(招魂牌)가 수원 제암리교회에 걸려 있다.
땅은 비온 후 더욱 굳어지듯이 역사는 아픈 만큼 더 성숙해진다. 우리의 3·1정신은 우리 온 겨레의 가슴속에 뜨거운 불씨로 남고, 그리고 세계 만방에 우리를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그의 딸에게 전한 시에서 당시의 한국을 이렇게 읊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큰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엔, 동방의 밝은 빛이 너는 되리라.』
3·1 정신은 ‘나’보다 ‘우리’, ‘우리’보다 “조국"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바탕이 된 독립운동이고,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서 이 정신을 계승하여 민주공화국을 세웠다고 했다.
84년전 그때 숨겨진 태극기가 물결치고, 젊은이들이 앞장서고, 종교인들이 단합한 것처럼, 우리도 다 같이 태극기를 집집마다 직장마다 게양하고, 기념식도 한인회 중심으로 2세를 앞세운 “열린 3·1절 기념식"으로 발돋움했으면 한다.
구태 의연하게 해마다 소수의 1세들만이 참석하여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참가 인원의 성황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ikhchang@aol.com
멤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