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현직 내과의로 활약중인 안재호 박사의 가족은 국법으로 가족이민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던 지난 1959년 미국에 들어왔다. 해방 후 정식 가족이민 2호 패밀리다.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주한 미대사가 귀임하면서 데리고 들어온 운전사였다.
한국서 연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산 결핵요양소 의무과장을 7년간 지낸 그가 미국에 온 것은 거의 반백년 전인 54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들어온 뒤 가족이민 초청을 했으나 한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애태우다 우여곡절 끝에 나머지 가족들도 이민 케이스로 데려올 수 있었다.
안 박사는 그 후 뉴욕과 아칸소에서 의사생활을 하다 67년 달라스 인근 타일라시로 이주했다. "당시엔 한국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주말마다 100마일 거리의 달라스에 와 유학생 등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도미한 이래 줄곧 미국교회에 나가고 있고 달라스 예술박물관 등에 2만달러를 기부한 적도 있는 그는 비록 미국생활을 반백년 가까이 하고 주류 진출에도 성공했지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잊은 적이 없다.
그는 "어릴 적에 배운 동요 가운데 ‘할미꽃은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오리는 오리를 가도 오리 백리를 가도 오리’라는 것이 있었다"며 "한국인은 이민생활 5년을 해도 100년을 해도 한국인"이라는 지론을 펼친다.
동시에 그는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지만 자녀도 미국인과 결혼시키는 등 주류사회에 융합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래야 조국도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비전염성 결핵연구의 권위자인 안 박사는 말로 하는 사랑의 실천에 그치지 않고 33년 전부터 매 2년마다 경북 무의촌 지역을 찾아 무료 인술을 펼쳐오고 있다. 자녀와 사위, 자신을 포함 6명이 의사인 가족을 이룬 그는 현재 부인 안선덕(73) 여사와 함께 달라스의 베벌리힐스인 글렌레이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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