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악의 스포츠 경기장 참사 희생자들이 마침내 공식 사과를 받아내면서 오명을 벗게 되었다. 23년 전 초만원 축구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은 96명의 희생자에게 사고 책임을 떠넘기느라 경찰이 증거를 조작했음을 보여주는 비밀 파일들이 지난 12일 공개된 것이다.
이날 공개된 무려 45만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들은 경찰이 자신들의 과오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은폐했는가를 소상히 담고 있다. 당시 경찰은 1989년 4월15일 영국의 셰필드에 위치한 힐스보로 스태디엄에서 숨진 사람들에게 참사 유발의 누명까지 씌운 것으로 드러났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열린 이날 경기장 입구엔 수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의 구장들은 거의가 입석이었는데 경찰이 밀려드는 팬들을 계속 들어가게 한 곳도 펜스로 구분해 놓은, 이미 초만원 상태의 입석 섹션이었다. 입장 제지를 받지 않은 뒤쪽의 팬들이 엄청나게 앞쪽으로 밀리자 펜스가 무너지면서 96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희생자들은 대부분 원정 온 리버풀의 팬들이었다.
당시 철책과 인파 사이에 끼어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와 희생자들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전해진 최악의 비극은 영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러나 희생자의 상당수가 술에 취해있었고 폭력전과를 가졌으며 그중 일부는 사건 당시 부상자를 돕던 경찰과 의료요원들에게 소변을 휘갈기기도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충격은 혐오와 비난으로 바뀌었다.(사고의 요인이 ‘만취한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인식되면서 영국에선 그 후 각 경기장에서 입석 및 음주 금지, 훌리건 적극 진압 단속 등의 경기장 개선 규정이 도입됐다.)
그러나 이 같은 보도는 오보로 밝혀졌다. 더구나 그중 일부는 사우스요크셔 경찰이 고의로 흘린 거짓 정보였다.
오히려 경찰의 안전관리와 응급 의료서비스가 적절한 협력을 못 이루면서 신속한 대응을 지연시켰다고 이번에 발표된 ‘힐스보로 독립 패널’의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경찰은 경찰 리더십에 대해 부정적 코멘트를 한 116건의 증언을 포함한 164건의 진술을 조작해 참사의 책임을 ‘술에 취한 극렬 축구팬들’에게 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망자 중 41명은 제때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12일 모두가 숨죽인 듯 숙연한 하원에서 데이빗 캐머런 총리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엄숙한 표정으로 사과를 전했다.
“유가족들은 그동안 이중의 부당함을 견디어 왔다 : 처참한 사건 자체의 부당함, 그리고 희생자들이 죽음을 자초했다고 몰아간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부당함”이라면서 캐머런 총리는 성명을 통해 “그날과 그날 이후 발생한 일은 잘못이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20여 년간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 온 유가족들은 안도와 분노를 동시에 표했다.
“우리는 보상을 받으려고 희생양을 찾는 복수심과 악의에 찬 무리로 비난 당해왔다”고 그 억울한 거짓 모함을 참아야 했던 힐스보로 유가족협회의 트레버 힉스 회장은 말한다. “이제야 우리는 진실규명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겁니다”
드러난 진실 중 유가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희생자들 중 절반은 검시문서와는 달리 현장에서 즉시 사망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증거들이다. 그러나 적절한 응급처치가 신속히 취해졌더라면 그들이 생존했을지도 모른다고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 판매부수 1위의 일간 타블로이드 ‘선(the Sun)’은 참사 며칠 후 1면에 “진실(The Truth)”이라는 전단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고위직 경찰관과 지역 의원의 주장을 근거로 작성한 기사였다. 사망한 상당수 희생자들을 ‘축구 훌리건’들로 몰아간 내용의 이 기사는 당시 희생자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는데 일조 했었다.
12일 당시 편집인이었던 켈빈 맥켄지도 선정적 제목에 대한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20여년에 걸쳐 40여만 페이지의 서류에 밝혀진 사실에 자신도 경악했다는 그는 “당시 ‘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면 훨씬 정확했을 것”이라면서 “나도 오도당한 것이다. 고위당국자들의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 참사와 관련 경찰을 비롯해 어느 정부 관계자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밝혀진 보고서 내용에 의해 처벌 문제가 재조명될 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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