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컬럼비아대 정치학도, 비즈니스맨으로 날개 펴다
차문영이 40년간 운영했던 아시안하우스
70년대 말. 필자가 뉴욕의 일간지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독자 한사람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다. 맨하탄 56가 7애비뉴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 태극기가 거꾸로 달려있다는 고발이었다. 일국의 국기를 함부로 달수가 있느냐는 거친 항의도 뒤따랐다. 취재기자를 현장에 보내 확인한 결과 ‘아시안하우스’라는 골동품 점포에 성조기와 일장기, 그리고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는데 유독 태극기의 궤가 잘못 위치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한국인인데 해외출장 중이었고 미국인 점원이 3국 국기의 먼지를 턴 후 잘못 걸었다는 해명이었다. 태극기는 네 귀퉁이를 차지한 궤의 위치 때문에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80년대엔 뉴욕총영사관이 들어있던 맨하탄 57가 파크 애비뉴 코너에 위치한 한국센터에도 태극기가 잘못 게양된 사진이 신문에 실려 곤혹을 치룬 사건이 있었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1966년 맨하탄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7애비뉴 56가에 코너에 8,000 스퀘어피트 넓이의 공간에 ‘아시안 하우스’를 오픈한 주인공은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차문영(사진)이었다. 1954년 도미 유학생으로 7년간 전공했던 학문의 길을 접고 자영사업에 뛰어들기까지에는 나름대로의 곡절이 있었지만 차문영이 처음 기프트샵을 오픈한 곳은 아시안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57가 5애비뉴와 6 애비뉴 사이에 있는 240스퀘어피트의 작은 공간이었다. 위치는 그런대로 좋았으나 그의 표현대로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였다. 착수금은 당시 1만 달러 정도였고 취급품목은 일본제 도자기, 한국산 자개, 중국산 병풍 등이었다. 이때가 1961년이었으니까 해방 후 유학생 출신으로는 뉴욕에서 제일 먼저 비즈니스에 진출한 셈이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공부가 끝나면 학위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 학계나 공무원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에 잔류하는 측은 전공과 관련된 분야의 연구소로 들어가는 것이 그 당시로선 대세였다. 그러나 차문영은 당시 소수민족으로선 미개척분야인 자영사업에 뛰어들었다. 석사학위를 받기 전 61년 잠시 귀국했을 때 둘러본 국내 상황은 정치적으로 혼란기였고 자신이 배운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또한 일제시대부터 그의 부친이 경영했던 통조림 군납업체인 조선물산공업주식회사는 6.25때 폭격으로 공장이 파손된 그 후유증에 아직도 허덕이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60년 줄리어드에서 하프를 전공한 임순옥과 결혼한 후 미국에서 자립의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처음 그가 취급한 도자기, 자개, 병풍 등 품목은 문화재에 가까운 수준높은 상품이어서 취급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단가가 너무 높아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어필하지 못하는 품목이었다. 장래성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가 우연히 착안한 품목은 동양식 램프. 램프의 몸통은 화려한 문양의 동양 화병에 갓은 미국제를 얹고 받침대는 중국제 나무를 조립한 훌륭한 동양램프가 출현했다. 맨하탄의 일류백화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상품으로 특히 실내장식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개업당시 진열했던 기프트 아이템을 모두 치워버리고 동양램프 일색으로 바꾸고 나니 제법 비즈니스가 되었다. 창업 3년만에 길 건너에 3배가 넘는 점포를 새로 열었고 65년 23가 3애비뉴와 67년엔 58가 3애비뉴에 네번째 스토어를 열었다.
그런 와중에 비즈니스를 키우기 위해서는 은행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당시 그에게는 생소했던 SBA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연방정부 산하 소기업청을 통해 저금리로 사업자금을 융자받는 제도였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SBA융자였지만 4년간 꾸준히 키웠던 비즈니스의 실적을 인정받아 5만 달러를 융자받아 규모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SBA론은 그 조건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는 융자인데 그 시절 한인으로서는 처음 받는 융자였다. 그로서 구멍가게 신세를 면하고 한단계 올라서 본격적인 사업체재로 진입한 셈이었다. 이때 세운 것이 아시안 하우스였고 퀸즈 롱아일랜드시티에 비슷한 크기의 창고도 운영했다.
연간 수백만 달러의 매상을 올렸고 생활이 안정되자 60년대 말 한인사회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가 졸업한 경기고 동창회장, 뉴욕한인골프회장, 뉴욕한인회 이사로 참여하다가 조시학 회장 당시 이사장을 맡아 한인회 살림을 책임진 적도 있었다. 차문영은 2001년까지 40년간 아시아하우스를 운영했고 2005년 타계했다. 60년대 초에 출생한 그의 두 아들 빅터와 마이클은 브롱스 리버베일에서 초중고교를 다니며 주말에는 뉴욕한국학교에서 우리말도 배웠다. 그후 빅터는 컬럼비아대로, 마이클은 펜실베니아대(와튼 스쿨)로 진학했다. 특히 아버지의 전공을 이어받은 빅터(한국 이름 동)는 컬럼비아에서 정치학 학사와 박사를, 옥스포드에서 석사를 취득하며 동아시아 정치를 전문분야로 정하고 학계로 진출했다.
빅터 차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조지타운대 정치학과의 국제관계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한국담당 책임자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서울에서 열린 ‘통일과 통일후 한반도’ 세미나에 참석해 미국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04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국장으로서 부시대통령을 보좌해 백악관 근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북핵 6자회담 및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회담에 대표로 참석했다.
그 무렵 필자와 자주 연락을 취하던 차문영이 “아들 녀석이 백악관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백악관에서 신분조회가 왔다”며 대견해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과거 자신이 접었던 전공을 살려 대신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고 있는 아들에 대해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후 빅터는 부시대통령의 측근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에 직접 영향을 미쳤으며 정권이 바뀌자 조지타운대로 돌아가서도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최근엔 USC의 데이비드 강교수와 함께 ‘북핵 퍼즐’이란 책을 펴내 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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