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내장요리로 별미인 순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리트 미드여사는 “이 세상에서 쇠고기를 부위별로 맛을 세분하는 미각문화(味覺文化)를 가진 민족은 한국 사람과 동 아프리카의 보디 족(族)일 뿐일 것이다.”라고 했다.
육식민족은 소를 35부위로 나누고 일본 사람은 15부위 한국 사람은 무려 120 부위로 세분해서 먹는다.우리는 정육만 먹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발끝, 꼬리 끝까지 근육 내장은 물론 혀 바닥, 젖통 살, 도가니, 뼈 속의 골수, 껍질에 이르기까지 부위별 이름을 붙여 소 한 마리를 알뜰하게 먹었
다.그러면 우리는 언제부터 소의 내장이나 부속물들을 음식으로 요리해 먹었을까?
[고려사(高麗史)] 최 안도(崔安道) 전(傳)에 의하면 ‘마계량(馬 季良)이란 자가 있어서 우양(牛양)을 즐겨 구워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원나라 초기 몽고풍이 깃든 [거가필용(居家必用)]이라는 약 390조의 조리법이 소개 된 가정대백과사전이 나왔는데, 이 책의 양육회방(羊肉膾方)에 “양(羊)의 간이나 천엽을 날로 가늘게 썰어 생강가루를 넣고 식초에 담가 먹는다.”고 소개 되었다.
숙종(肅宗)45년(1719년)의 [진연의궤(進宴儀軌)]에는 우체(牛體)의 부위 명으로서 우각(牛脚), 양, 간(肝), 영통(靈通), 전각(前脚), 갈비(乫非), 족(足), 외심육(外心肉), 광장(廣腸), 곤자손(昆者手),두태(豆太), 골(骨), 혀(舌), 부화(付火, 만화(滿火), 천엽(千葉), 볼기, 머리(頭), 쇠꼬리(牛尾)등이 나온다.
이렇듯 정육 외에도 갈지, 다리 쇠꼬리는 물론 내장을 조리해 먹었다.
옛날에는 소나 돼지를 잡게 되면 그 품삯으로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속물을 주었고, 소나 돼지를 잡는 백정들은 소나 돼지의 부속물을 품삯으로 받으면 도축장 주변의 식당에 넘기고 돈을 받았다.특히 내장 등 부속물들은 변질되기 쉬우므로 도축장 가까운 곳에 팔게 되므로 부속물을 이용해
조리를 해 파는 식당들은 대부분 도축장과 멀지 않은 곳에 먹거리 골목을 형성하게 된다.
내장 요리 중에 백미(白眉)는 순대일 것이다.순대는 가축의 창자 속에 두부, 숙주나물, 파, 표고, 고기 등을 양념하여 이겨 넣고 양쪽 끝을 동여 맨 후 익힌 것을 말한다.문헌에 등장한 최초의 순대는 [음식디미방]에 기록 된 개의 창자를 이용한 순대다.그러다 [주방문]에는 쇠 창자에다 선지를 넣어 삶은 선지순대와 [증보산림경제], [규합총서], [역주방문(曆酒方文)]에는 쇠 창자에다 고기를 다져 온갖 양념과 기름장으로 간을 맞추어 가득히 넣고 쪄 낸 순대 등이 설명 되었다.그러나 이들의 내용물로는 순대이면서 순대라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대부분의 순대골목은 재래시장에 형성 되어 있다.
전국에 대표적인 순대골목은 서울 광장시장 순대골목, 공덕동 순대골목, 신림동 순대골목, 통일로 토종순대, 안양 중앙시장 순대골목, 인천 중구 도원동 순대골목, 충북 충주시 무학시장의 순대골목은 순대접시에 순대는 물론 곱창, 간, 허파 등이 함께 담겨 나오는데, 곁들여 나오는 우
거지 국과 함께 그 맛이 남다르다. 그 외에도 천안의 병천순대, 전주 남부시장 순대, 제주 보성시장 순대골목 등 전국에 걸쳐 순대골목이 형성되어있다.이러한 한국의 내장요리는 이웃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사회에서 가축의 내장을 호르몬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한국인의 근대(近代) 이주사(移住史)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본래 일본인은 명치시대(明治時代)까지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서는 재미있는 사실(史實)이 남아 있다. 대마도에는 지금도 구로몬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한국 사절단을 대접하기 위해 고기를 반입하던 문이다. 즉 일본인들은 한국 사절단에게 고기를 대접하기 위해 문을 따로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다.
오사까 닛본바시부근에 가면 현재 구로몬 시장이라는 곳이 있다. 고기며 생선 따위만을 전문으로 파는 시장이다. 고기나 생선과 관련해서 일본인은 왜 꼭 구로, 즉 흑이라는 말을 쓸까. 살생은 어두운 것이고,
그래서 흑이라는 색으로 표현한 걸까.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일본인의 의식이 엿보이는 일면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이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명치시대부터이다. 고기라 해도 살뿐 뼈며 내장 따위는 하
나도 먹지 않았다. 이 습관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슈퍼나 고기전문점에 가면 뼈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일본사회에서 내장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이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이십세기 초부터 한국인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일본에 이주했다. 가난한 그들은 주로 일본의 특수부락 부근에 정착했다. 특수부락이란 전통적으로 일본의 천민들이 사는 마을이다. 일본의 천민도 우리나라처럼 소 잡
는 사람, 가죽일 하는 사람, 고리 엮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의 호르몬 요리는 태평양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의 노무자들은 일본으로 징용으로 끌려가 일본인이 먹지 않고 버리는 내장을 보고 대단한 횡재로 여겨 이를 가져다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요리법에 따라서는 살코기보다 더 맛이 있는 내장이 가난한 한국 노무자들에게는 단백질 보충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내장을 호르몬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 글로 옮기면 호르모노, 호르몬은 이 호르모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호르모노라는 말이 호르몬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발음이 비슷하다고는 하나 하고많은 말 중에 왜 하필 호르몬인가. 호르몬은 다 알다시피 혈액과 함께 우리 체내를 돌며 모든 기관(器官)의 작용을 촉진, 또는 억제하는 필수불가결의 물질이다. 호르몬의 균형이 깨지면 건강에 중대한 위험이 온다 하여 여러 가지 약재도 개발되어 있다. 특히 호르몬은 남성 호르몬, 여성 호르몬 하여 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요소로 인식되어 있다.
내장을 호르몬이라고 한 것은 재일 한국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재일 한국인은 처음에는 집에서만 먹다가 차츰 식당을 차려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그 때 일본인들에게 어필하는 명칭으로 창작해낸 것이 호르몬이라는 이름이 아닐는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당신들이 더럽다고 버리는 내장에는 사실은 기막힌 영양소가 있다.」그리고 그 주장은 이제 완전히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일본 어디에 가나 호르몬 요리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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