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뉴욕타임스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읽었다. 유럽의 유명한 지휘자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음악활동과 비행업무를 병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2024년 12월, 산타 체칠리아 국립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단원들을 모두 태우고 에어프랑스를 직접 조종하여 로마에서 파리까지 날아가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이 특이한 비행에 동행한 NYT 기자는 조종석에서 연료수치와 기상패턴 분석, 승객과 화물수량 집계 등 엄격한 비행업무를 수행하던 사람이 착륙 몇 시간 만에 무대에 올라 리허설과 공연에 몰입하는 마에스트로로 변신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이 재미있는 기사를 읽을 때만 해도, 다니엘 하딩(50)이라는 별난 지휘자가 LA 필하모닉의 차기 음악감독이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26일, LA 필하모닉은 오케스트라의 제12대 음악감독의 선임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둘러 (자신이 조종하지 않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하딩이 LA에 첫 선을 보인 이 자리에는 마지막 공연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구스타보 두다멜도 참석해 후임자의 새로운 비상을 축하해주었다. 급하게 조율된 이 타이밍은 두다멜이 떠난 공백을 단 하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영진의 절묘한 연출이었다.
기자회견에서 킴 놀테미 LA필 회장 겸 CEO는 지난 3년간 9명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연주자, 이사, 임원 각 3명)가 디즈니 홀과 할리웃 볼 포디엄에 오른 모든 지휘자를 차기 음악감독 후보로 고려했으며, 총 35명의 후보 중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한 인물이 다니엘 하딩이었다고 말했다. 선정위원 중 한명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빙 왕은 “하딩과의 리허설에서 단원들은 굉장한 유대감과 케미스트리를 느꼈고, 공연에서 마법 같은 놀라운 순간들이 펼쳐졌다”고 전했다.
재미있는 것은 약 30년전, 하딩이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던 미국 데뷔가 바로 LA필과의 공연이었다는 사실이다. 1997년, 21세 청년 하딩은 오하이 페스티벌에서 LA필을 지휘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고문과도 같은 연주가 이어졌고, 음악제가 끝날 무렵에서야 겨우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고 한다.
하딩은 이후 유럽에서 최정상의 지휘자로 올라섰지만, 드물게 이루어진 미국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는 엇갈린 평가를 받으면서 여기서 자리잡지 못했다.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이유다.
그러다 2024년 디즈니홀에서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지휘한 후부터 평가가 달라졌고, 2025년 할리웃 볼에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연주할 때 LA필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음악감독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한편, LA필의 대니얼 하딩 선임에 대해 오랫동안 ‘혁신’으로 유명했던 오케스트라가 ‘전통’으로 회귀했다는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LA필은 경험이 부족해도 카리스마 넘치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신예들에게 과감한 기회를 주어왔고, 이들은 LA필에서 위대한 지휘자로 발돋움하여 눈부신 스타가 되었다. 주빈 메타(인도), 에사 페카 살로넨(핀란드), 두다멜(베네수엘라), 모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클래식 변방의 청년들이었고, 메타와 두다멜은 26세의 나이에, 살로넨은 34세 때 지휘봉을 이어받았으니 그야말로 모두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이같은 ‘혁신의 전통’ 때문에 이번에는 최초의 여성이나 아시안 지휘자가 새 음악감독으로 발탁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홍콩 출신의 엘림 찬이 바로 2주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선임되면서 기대는 사라졌다. 샌프란시스코는 김은선 SF오페라 음악감독과 함께 엘림 찬의 영입으로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양 날개를 아시안 여성이 지휘하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도시가 되었다.
그에 비하면 하딩은 매우 안전하고 보수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혁신의 전통을 깬 혁신’이라 해야 할까. 하딩의 멘토였던 사이먼 래틀은 “LA필이 진정한 유럽 출신의 지휘자를 맞이하게 되었다”며 “그가 오케스트라에 완전히 새로운 색채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에서 본 하딩은 소탈하고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하며 편안한 사람이었다. 영국인 특유의 절제된 모습, 하지만 오케스트라 앞에 서면 경이로움 가득한 눈빛으로 섬세하게 지휘봉을 휘두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유튜브에서 들어본 그의 말러 교향곡 1번과 2번은 대단히 예민한 해석,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어주는 연주였다.
하딩은 이번 2026-27 시즌에 두차례(11월과 1월) 디즈니홀 무대에 선다. 그리고 1년 후인 2027-28 시즌에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면 첫 시즌에 8주, 다음 시즌부터 12주간 지휘하며 곧 ‘예술문화 명예감독’이 될 두다멜(4주)과 새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책을 맡은 살로넨(6주), 그리고 역시 새로운 ‘상주지휘자’ 애나 핸들러(3주)와 함께 중책을 나눠지고 LA필을 이끌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그가 구상중인 중요한 프로젝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파리와 LA 간 대서양횡단 에어프랑스를 직접 조종하는 훈련이라고 한다.
<
정숙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