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e Bae: En attendant (기다리며)-Museum San, Wonju-
▶ 숯의 화가 ‘이배’의 흔적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뮤지엄 산’은 한국 현대 미술가 이배의 개인전
를 기획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개관 이래 최초의 한국 작가 개인전이다. 뮤지엄의 근원적 철학인 자연, 예술, 공간의 조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작가의 조형 언어가 관객에게 다양한 경험과 사유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숯의 화가’라 불리는 이배(b.1956)는 1989년 도불하여 검은 숯으로 동양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화폭과 조각에 담으며 세계적 스타작가로 부상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엄청난 공력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 오는 12월 6일까지 8개월간 열리는 전시에 미술관 안팎을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 영상으로 작가의 30년 예술세계를 조망했다. 전시제목 ‘기다리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미래를 향한 시간,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 생성의 작용을 가리킨다.
‘Issu du feu’는 ‘불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는 거대한 숯덩어리 기둥으로 뮤지엄 산의 처마를 떠받들고 있다. 이 조각은 개별적인 숯 조각을 반복적으로 쌓고 결합하여 하나의 덩어리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단위가 공존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작가에게 숯은 생성과 소멸, 생명의 순환을 의미하는데,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숯가루의 질감이 단순한 검정이 아닌 깊은 흑색을 드러낸다. 2023년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도 이와같은 대형 숯 조각이 설치되었다.
‘Brushstroke’는 숯가루를 정교하게 압착하여 몸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을 붓질로 표현한 작품이다. 붓질은 소멸과 흔적, 삶과 죽음, 기억과 침묵과 같은 철학적이고도 깊은 사유를 발견해가는 매개체다. 화폭은 서체적 추상을 결합하여 한국형 모노크롬 회화를 구현하면서 절제된 여백의 미와 흑의 조형성이 드러난다. 16점의 평면 작품이 2점씩 마주하며 공간에 배치되어 마치 풍경 속을 산책하는 경험이다.
‘White’는 흰 종이로 도배된 백색의 공간이다. 이 곳 중앙에는 천장에서 내려온 종이가 아래로 길게 늘어지며, 곡선을 긋고 다시 반대편 천장으로 이어진다. 전시 공간에는 4점의 종이 조각이 있으며, 출구 쪽 벽에는 호치케스 드로잉 작품이 벽에 설치되어 있다. 이배에게 종이는 단순한 지지체가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고 확산시키는 매개로 작동한다.
‘Black’은 숯에서 비롯한다. 숯은 나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을 지나며 다른 상태로 변형된 물질이다. 숯은 소멸 이후에도 남아 순환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숯의 표면은 빛에 따라 미세하게 반응하며 깊이와 층위를 지닌 ‘살아 있는 검정’을 형성한다. 이러한 검정빛은 차이와 긴장을 포용하며, 비어 있음과 충만함 사이를 잇는다. 숯덩어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붓질은 작가의 몸과 시간이 축적된 행위의 흔적이다.
‘Becoming’은 높이 9미터에 달하는 LED스크린에 작가가 고향인 청도의 논에서 붓질한 영상이 송출된다. 그 앞에는 약 14미터에 달하는 논두렁을 만들어 현장을 그대로 재현했다. 작가는 농부의 아들로 성장한 배경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황무지에 선 농부’라고 했다. 논두렁 작업은 정신성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수행의 과정이다.
자연과 건축, 조형이 확장된 풍경으로 결합된 이 전례없는 크기의 검은 조각과 화면 사이를 거닐며 관람객은 계절과 빛의 변화, 산과 공간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 속 예술을 경험하게 된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이 미술관의 동선과 이배의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성을 띈 조형세계가 결합되며 관람객을 이끈다. 이 전시는 필자가 근래 관람한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이고, 작가 이배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깊이 이해한 자리였다.
<도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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