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문화강국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말을 나는 그저 흘리듯 들었다. 케이팝, 소수의 천재, 최근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분이려니 했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러 10월에 한국을 다녀왔다. 가을의 한국은 유난히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번 여정을 통해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신분당선을 탔다. 환승역 내리는 곳을 안내하는 음악이 달라졌다. 몇 년 전에는 경쾌한 클래식이었는데, 이제는 국악이다. 지금도 그 앵앵거리는 멜로디가 귀에서 춤추듯 울린다. 광고판 모니터에 시선이 갔을 때, 뜻밖에도 그달에 태어난 화가를 소개하는 화면이 나왔다.
‘이달의 탄생화(畵)’로 그 유명한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그의 다른 작품이 있었다. 11월에는 ‘클로드 모네’ 작품을 이달의 탄생화로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는 다들 스마트 폰 보기에 바쁘지만, 잠시 눈을 들면 그달의 탄생 화가에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게 되어 있다. 앞으로 두 작가의 탄생 연도는 잊어도 탄생한 달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대구 간송미술관에 갔다. 바람에 한 방향으로 잎이 날리는 ‘풍죽(風竹)’이라는 작품이 인상 깊었다. 부끄러워 한사코 외면하는 여인의 모습과도 같았고, 약한 듯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부드러운 기개가 느껴졌다. 사방이 대나무로 가득 찬 영상으로 ‘풍죽’을 재현하는 방에 들어갔다. 그 스산한 대숲의 소리가 아직도 들려온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진품은 보지 못했으나 단원 김홍도의 작품과 그 외 다른 보물들, 우리 역사의 수준 높은 흔적을 보았다. 이 모든 위대한 수집을 한,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감사함이 저절로 끓어올랐다.
대구 출신 지인의 안내를 받아 수성못에 갔더니 ‘상화 이상화’의 동상이 있었다. 큰 바위에 쓰인 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문을 봤다. 마침 문화 해설사이기도 한 지인의 설명으로 바로 그 앞의 거대한 옥토가 일본인의 집요한 애착에 다 빼앗긴 뒷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그 시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은 빌딩과 집들로 가려졌지만 드넓었던 그 땅, 빼앗긴 그 논과 밭을 상상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지나는 여정마다 시와 문학, 예술이 있어 스며들고 흠뻑 젖었다. 이런 환경이 국민을 문화적으로 성숙하게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중앙이나 지방 공무원의 안목이 높은 것일까?
지하철 안전문에 시가 쓰여 있다. 곧바로 전철이 도착해 다 기억이 나진 않고 끝의 시구만 뚜렷이 남는다. 어렴풋이 떠오른 내용은, 추운 겨울 벤치에 앉은 이가 일어났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자신이 앉아 데워놓은 자리에 앉으며 ‘아! 나는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이 표현이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이 말은 한국 여행의 마지막 선물로 마음에 깊이 심어졌다.
이렇듯 한국의 문화는 시민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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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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