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말경이었다. “할매 어데 갔노? 날 두고 어데 갔노?” 온 동네를 소리 지르며 헤매던 아이가 있었다. 바로 나였다. 혼자 시골 다니러 간 외할머니를 찾던 손자의 절규였다. 모두 키득키득 웃기만 했지 대답을 안 했다. 조혼한 엄마 편하라고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시골을 자주 다니다 보니 어느 틈엔가 역마살이 끼었는지, 이젠 같이 나서지 않으면 참지 못하였다.
대구역에선 부산에서 올라온 열차가 정차하면 먼저 자리 잡으려고 난리였다. 완행열차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11시간이 넘게 걸리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힘에 밀리던 나와 할머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열차가 도착하면 가벼운 나를 창문으로 들어 올려 먼저 자리 잡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주효했다. 할머니 목도리를 들고 열차 안으로 다이빙하듯 들어간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목도리를 옆에 두었다. 좌석을 찾던 승객들이 혼자 있는 나에게 의아한 눈초리로 빈자리냐고 물으면 “우리 할매 변소 가서 금방 올 낀데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나를 두고 할머니가 혼자 시골에 가버린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꿈에도 나를 두고는 아무 데도 못 다녔다. 언젠가 잠도 제대로 못 깬 나를 업은 채 시골로 출발했는데,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나는 어떤 노래와 요란한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시골 5일 장터의 가게집 툇마루였다. 곁에 할머니가 없음을 알고 황당하던 나는 두리번거리다 할머니가 “인자 깼나?” 하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주변에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꽃가마 같은 것을 여러사람이 붙들고 막 출발하려 하고, 뻣뻣한 천으로 만든 누런 모자와 옷을 입고, 새끼줄로 머리와 허리를 동여맨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울음과 노래로 주위가 요란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나는 의문이 생겨 싱긋 웃으며 물었다. “할매, 저 사람들은 와 저런 옷 입고 울면서 노래하노? 낙동강은 차 타고 요기 잠깐 가면 나오는데, 요단강은 얼마나 멀길래 며칠이나 간다 카노?” 할머니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요란한 꽃가마가 사람들 손에 끌려 떠났다. 꽃상여였다.
잠시 후, 검은 머리카락 하나 없는 새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부탁하는 말을 들었다. “여보게, 자네에게 부탁할 말이 있네. 내가 죽고 나거든 염을 꼭 부탁하네.” 할머니는 흔쾌히 “염려 마이소.” 하고 대답했다. 시골에 갈 때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노인들로부터 이런 부탁을 종종 받았지만, 할머니는 염습으로 돈을 벌어본 적은 없다. 그런 부탁을 하는 할머니들은 죽어서도 같은 여성인 할머니에게만 시신을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답례는 버선 한 켤레와 정중한 감사의 인사 한마디가 전부였고, 할머니는 자비로 기차를 타고 다니며 험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할매, 염은 어떻게 하는 건데?”
“사람이 죽으면 저세상 가는 옷으로 갈아입히는 거다. 하늘나라 갈땐 좋은 옷 입고 가야지, 사람이 죽으면 몸이 돌같이 굳어지는데, 옷을 갈아 입히려면 굳은 팔다리 때문에 옷을 벗길 수도 없고 입힐 수도 없다. 니도 옷입고 벗을라믄 팔다리 구브려야 되재. 그래서 굳어버린 팔다리를 꺾어야 할 때도 있다. 온 힘으로 굳은 팔다리를 누르면 삐이익 대문 여는 소리도 나고, 뚝닥닥거리며 부러지는 소리도 난다.” ‘아이고 무서워라…’ 죽음도 모르는 나도 무서워졌다. 부러트린다니까.
예수 믿는 이들만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교회에는 평생 나가지 않던 외할머니. 나는 그 연유를 장성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낙동강 바로 북쪽 경부선 시골역에 도착한 부해리 선교사와 네 가정이 초가집에 모여 교회를 세웠는데, 그중 한 분이 그녀의 시아버지 즉 내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내게는 외증조부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인척들에게서 받았던 어려움 때문에 교회 만큼은 가까이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하였다.
할머니의 일가들은 어려울 땐 부잣집이 아닌 형편 어려운 할머니에게 와서 돈을 빌려갔다. 빌려주지 못하면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쫓아가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주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금반지는 늘 출장 중이었다. 나는 할머니 손이 외삼촌 등 자식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역 근처에서 가짜 금반지를 사다 끼워드리곤 했다. 그러니 나도 동조자였다.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자애롭고 헌신적인 분이었다. 주변 누구보다 성도다웠던 할머니는 돌아가실 무렵이 되어서야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교회로 귀의하였다. 나에게도 “교회 다니면 좋은 것만 배우지. 나쁜것은 안가르치니까.”하며 은근히 예수 믿기를 권유하였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할머니는 내 앞날을 축복하며 내 삶과 환경이 어떠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나조차 믿기 어려웠던 그 말씀들은 이상하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적어도 내 삶의 여정에서는 그랬다. 어쩐지 할머니의 말씀이 야곱이 요셉에게 해주었던 예언처럼 자상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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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훈 수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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