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기호 중 ‘머무름’을 뜻하는 ‘페르마타(fermata)’가 있다. 아래로 뚫린 반원 아래 점이 찍혀 있어, 시각적으로도 눈으로 바라보며 잠시 멈추는 느낌을 준다.
이 기호는 아주 특별한 순간에 쓰인다. 소리가 나는 음표 위든,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쉼표 위든, 페르마타가 붙으면 그 길이는 지휘자나 연주자의 감정과 해석에 따라 자유롭게 달라진다. 즉, 음악 속에서 시간이 멈추고 감정은 가장 길게 숨 쉬는 구간이다. 약속된 박자에 구속받지 않고 긴장이나 감동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곡의 흐름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길게 머물러 감상하게 한다. 단순한 쉼이나 멈춤이 아니라, 감정의 공명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추석은 바로 이 페르마타와 같은 날이다. 사실 이날은 언뜻 한 해가 마무리되는 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긴장이 고조되는 날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수확을 끝낸 감사의 날이라면, 추석은 수확을 시작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날이다. 수확을 앞두고 지난 계절을 위로하고, 수확을 무사히 마치자며 서로 격려하는 시간이다.
추석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음악과 여인, 그리고 달을 빼놓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추석은 신라 유리왕 때의 축제에서 비롯되었다. 왕은 부녀자들을 두 패 여섯 부로 나누고 왕녀 두 명을 그 수장으로 삼았다. 그들은 머슴들의 명절이라 할 백중 다음날인 음력 7월16일부터 부잣집 마당에 모여 한 달 동안 삼을 삼았다. 삼나무 껍질에서 섬유질을 뽑아 실을 꼬는 과정으로, 겨우내 베를 짜고 옷을 지을 길쌈의 시작이었다.
음력 8월 보름날, 한 달간의 방적 대회가 끝나면 실을 더 많이 짠 편에게 진 편은 음식을 차려 잔치를 열었다. 이때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는 ‘가무백희(歌舞百戱)’를 ‘가배(嘉俳)’라고 불렀고, 오늘날 ‘가윗날’과 ‘한가위’의 어원이 되었다. 가무백희는 요즘으로 치면 장기자랑이었다. 춤과 노래뿐 아니라 곡예, 탈춤, 가면극 등 다양한 장르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 축제였다.
승자만 즐긴 것은 아니었다. 진 편은 “회소, 회소”라 노래했는데, 이 ‘회소곡(會蘇曲)’은 패배의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노래였다.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곡조는, 노래가 단지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화음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그들이 한 달 동안 짠 실은 남자들의 활쏘기 대회 상품으로도 쓰였다. 한 해 내내 흙을 일구며 고된 노동을 이어온 남성들에게 “이제 마지막 힘을 내라”는 응원의 음악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인들은 보름달을 온몸으로 그리며 강강술래를 춤췄다. 훗날 전쟁 기록에 나와서 마치 그때 만들어진 걸로 착각하기 쉬운데 강강술래는 모든 이들이 함께 한 마음으로 공동체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며 달빛 아래 추던 춤이었다.
노래와 춤, 실과 활, 남자와 여자의 노동이 하나로 이어진 그 구조 속에서, 추석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노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였다.
“회소”의 의미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그만하라’는 탄식으로, 혹은 ‘다시 모이자’는 위로의 말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 어원이 무엇이든, 그 안에는 상실과 회복, 슬픔과 희망이 함께 존재한다. 패자의 노래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공동체의 화음으로 이어졌듯, 음악은 언제나 인간의 감정을 일으켜 세우는 언어였다.
추석의 음악은 그렇게 우리의 모든 감정에 닿아 있다.
음악은 달과 닮았다.
또 인생도 그러하다.
차오르고 다시 기울고, 기쁨도 슬픔도 그렇게 리듬을 타며 흘러간다. 그래서 음악은 즐거움의 도구이자 위로의 언어이며, 인간이 감정을 견디고 다시 살아내기 위한 가장 오래된 기술이었다.
요즘의 추석은 길어진 연휴와 교통체증, 형식적인 가족 모임으로만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본래의 추석은 한 해를 돌아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 페르마타 같은 날이었다. 잠시 멈추어 마음을 추스르는 날. 처음으로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조상께 감사드리고, 음악과 놀이로 서로 기운을 북돋우며, 남은 한 해의 건강과 행복을 다짐하던 시간이었다.
그 본뜻을 되살려, 한가위를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가족이 함께 한 해의 중간 점검을 하는 날로 보낸다면 어떨까.
“나는 지금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보름달은 오늘도 세상을 고르게 비춘다. 아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달빛은 늘 밤을 비추고 있다. 이긴 자에게도, 진 자에게도, 멀리 있는 이와 가까이 있는 이 모두에게 같은 빛을 내린다. 그 빛 아래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노래한다.
모이소, 다시 깨어나소, 그리고 함께 노래하소.
그것이 2,000년 전 신라 여인들이 남긴,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시 이어 부르는 가장 오래된 한가위의 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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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YASMA7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