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검진서 유전자등록…기적처럼 친아버지 만나
▶ 입양아 출신 혼혈 “한인 친어머니 만나고 싶지만…” “매일 김치 먹어…한인사회의 환영은 상상 못한 일”
“기적처럼 친아버지를 55년만에 만났습니다.”
서부 지역 최대 공항이자 미 전국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LA 국제공항의 치안을 책임지는 LAX 공항경찰국 수장에 오른 세실 램보 국장의 인생 스토리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한국에서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 사이에서 태어난 직후 미국으로 입양돼 아웃사이더로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낸 입양아 출신 혼혈 한인 2세가 미 최대의 서부 관문인 LA 국제공항의 경찰국장에 오르기까지 그의 성공담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최대 여행 인파가 몰리는 성탄과 연말 휴가 시즌을 앞두고 공항 치안 업무로 분주한 세실 램보 LA 국제공항 신임 경찰국장을 집무실에서 만나 영화처럼 극적인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특히, 몇 년 전 55년만에 기적처럼 생부를 만난 그의 사연이 몹시 궁금했다.
5년 전 생부를 극적으로 만난 생부와의 상봉 이야기를 묻자 램보 국장의 표정이 상기됐다.
“처음에는 사촌이라도 찾으려고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사촌을 통해 기적적으로 친아버지를 만나게 됐다”고 놀라운 경험을 얘기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만나게 된 사촌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의 삼촌과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고, 이내 이들은 상봉하게 됐다. 친아버지가 살아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그는 처음 친아버지를 보고 마지막 퍼즐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지난 2015년 그의 양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병원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그는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와 당뇨 전증을 진단받았다. 평소 꾸준한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던 그는 유전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유전자 검사를 받게 됐고 친아버지를 찾게 되는 기적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양부모님이 날 사랑으로 키워줬기에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지만, 친아버지를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르게 특별한 일이었다”라고 당시의 감정을 야기했다. 두 부자가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너무 닮아서 서로 놀랐다고 한다.
현재 LA에서 두 자녀와 살고 있는 그는 “라스베가스에 거주하는 친아버지와 자주 연락을 하며 오랜 시간의 거리를 건너 뛰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에 있는 친어머니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한국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시도마저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그는 “가능하다면 친어머니도 만나고 싶지만, 한국의 유전자 검사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나 한국 문화가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생후 5개월만에 미국으로 입양돼 미국인 양부모 밑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
지난 1959년 3월 한국에서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생후 5개월, 미국으로 입양된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흑인인권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 어린 학창시절부터 흑인 가정에서 동양적인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며 흑인사회에서도, 한인사회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암흑의 시기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던 그는 셰리프 경관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며 화려한 경력을 채워나갔다. 북가주 험볼트대학교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졸업한 그는 그저 막연히 취직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LA경찰국과 LA카운티 셰리프국에 지원했고, 합격 통보가 빨랐던 셰리프국을 택했다.
그 후 셰리프국에서 33년 간 마약전담, 동양인 수사과 수사과장, 커맨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2014년 셰리프국에서 은퇴한 그는 이후 캄튼시, 카슨시의 매니저로 쉼 없이 일하다 결국 미 전역에서 두 번째로 가장 이용객이 많은 LA국제공항의 치안을 총괄하는 공항경찰국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나는 늘 또래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멘토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 조언을 구했고 이내 내가 속한 조직에서 좋은 평판과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자신의 성공 뒤에는 끊임 없는 노력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지난 2010년 한국 경찰청의 초대로 처음 방문했던 고향 한국에서 받은 인상도 그에게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됐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있다는 모습에 그간 맞춰지지 않았던 퍼즐조각이 맞춰졌다고 한다. 그는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내가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피부로 깨닫게 됐다”며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그러한 한국인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어 나 또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냉장고에는 항상 김치가 떨어지지 않아야 하고, 직접 구워먹는 것이 별미인 갈비를 제일 좋아한다”는 그는 “한인사회에서 나를 한인으로 받아들여주며 오히려 환영까지 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가 현재 이 자리까지 올라온 데에는 뜨거운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한인사회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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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구자빈·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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