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사 중역의 구직 여성에 대한 강간, 검찰도 막판에 가서 ‘기소 유예’ 로 무마
▶ 아직은 미풍에 그치는‘Me too’
토쿄방송의 워싱턴지사장 야마구치 노리유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이토 시오리.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으나 언론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Jeremie Souteyrat/뉴욕타임스]
3년 전의 어느 봄날, 이토 시오리(28)는 일본의 유명 방송인으로부터 가볍게 술 한 잔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야마구치 노리유키(51)의 술자리 제의는 이토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당시 일하고 있던 방송사와의 인턴직 계약기간이 거의 만료된 상태라 마침 여기저기 일자리를 수소문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는 뉴욕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던 중 일본 최대 민영방송사 TBS의 워싱턴 지사장인 야마구치와 두어 차례 스쳐 지난 적이 있었다.
2015년 초,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총 가동 중이던 이토는 별 기대 없이 야마구치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전기를 집필한 언론계 거물 야마구치가 단 두 차례 대면한데 불과한 신출내기 방송기자 지망생을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그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토의 사정이야기를 들은 야마구치는 그녀가 TBS 워싱턴지사에 인턴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호출’같은 ‘초대’를 받은 이토는 자신의 취업문제와 관련해 야마구치가 TBS 관계자들과의 술자리를 주선한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약속장소에는 야마구치만이 나와 있었다. 2015년 4월 3일, 둘은 토쿄 번화가 에비수에 위치한 스시 전문점 키이치에서 사케와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그날 밤 그녀의 기억은 거기까지가 전부다. 식사도중 너무 어지러워 야마구치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에 머리를 처박은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새벽 5시경, 이토는 야마구치의 호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야마구치는 발가벗겨진 그녀의 몸을 짓누른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통증도 느껴졌다.
간신히 몸을 빼내 화장실로 달려간 그녀는 망가진 몸 상태를 확인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잠에서 깨어난 야마구치가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겨 다시 침대에 눕히려 들었다. 그러나 이토는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는 야마구치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달라고 요구했고, 콘돔을 사용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피임기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후피임제인 모닝 애프터를 구해줄 터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녀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곧바로 병원이나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강간 피해자들이 그렇듯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신의 집에 숨어버린 것. 마침 그날은 토요일로 휴일이었다. 이토는 연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경찰서를 찾았다. 사건발생 5일만의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요즘 연예계와 정계,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재계는 물론 언론계에 이르기까지 유명 인사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들의 커밍아웃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까지 불똥이 튄 이른바 “미투”(Me too) 캠페인이다.
반면 이토의 사례는 일본에서 성폭력은 여전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주제로 남아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성폭력 피해여성이 경찰에 가해자를 고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설사 고발한다 해도 가해자가 체포되거나 기소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본 관방부가 2014년에 실시한 서베이에 따르면 일본 여성은 15명 당 한 명꼴로 성폭행을 겪는다. 5명 당 한명인 미국에 비해 훨씬 낮은 수치다.
그러나 학자들은 서구의 여성들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행위를 무조건 강간으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관련법에도 쌍방 합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따라서 지인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데이트 강간은 일본인들에겐 이질적 개념이다.
경찰과 법원은 강간을 협의적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물리적 힘과 정당방위의 흔적이 분명한 경우에 한해서만 성폭행 케이스로 인정한다. 만약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술을 마셨다면 이후에 발생한 사태와 관련해 가해자를 고발하기 힘들다. 이토 역시 같은 경험을 했다. 야마구치를 경찰에 고발했지만 경찰은 처음부터 사건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토가 사건현장인 호텔의 폐쇄회로 TV에 찍힌 영상과 자신과 야마구치를 호텔 앞까지 태워준 택시기사의 증언을 확보해 증거로 제시하자 경찰도 마지못해 수사에 착수했다.
이토는 경찰 조사에서 야마구치가 마취약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고 진술했으나 물증을 제시하지 못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야마구치는 결백을 주장했다. 식당에서 만났을 때 이토가 너무 술을 빨리 마셔 자신이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목이 마르다”며 말을 듣지 않았고, 식당 화장실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를 자신의 호텔방으로 데려간 것은 사실이나 워싱턴 시간에 맞춰 급히 마무리해야 할 기사가 있었고, 도저히 혼자 집에 갈 수 없는 상태였던 이토를 그대로 버스 정거장이나 호텔 로비에 남겨둘 수가 없어서 그랬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는 그날 밤 강간은커녕 둘 사이에 성행위 자체가 없었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전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부축하고 호텔 방으로 향하는 야무구치의 모습을 잡은 CCTV동영상과 이토가 정거장으로 가달라고 말한 뒤 정신을 잃자 야무구치가 호텔로 방향을 수정한 후 축 늘어진 그녀를 끌다시피 데리고 들어갔다는 택시기사의 증언, 이토의 브레지어에서 발견된 야마구치의 DNA, 사건발생 후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이메일에서 성행위가 있었음을 시인하면서도 이토가 먼저 유혹했다는 그의 주장 등을 확인한 경찰은 두 달간의 조사 끝에 미국에서 돌아오는 야마구치를 공항에서 체포할 것이라고 이토에게 사전 통보해주었다.
그러나 막판에 갑자기 내려온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체포는 이뤄지지 않았고,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곧바로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아베 총리와의 커넥션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잠시 항간에 나돌았으나 언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곧바로 시들해졌다.
그러나 이토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야마구치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냈다. 이토는 ‘침묵의 패턴’을 깨야한다는 생각에서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고 밝혔다. “부끄럽고 수치스런 마음에 나 역시 침묵을 지키고 싶었다. 남성이 지배하는 일본 언론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참아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진실과 마주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참 된 언론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언론은 성폭력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고 꼬집은 이토는 “왜 이런 관행이 옳지 않은 것인지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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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New York Tiems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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