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이었던 GE에서 소재 얻어
▶ 천재의 발견이 지구 멸망케 해
윤리 괴리된 지식 위험성 경고
2차대전 때 드레스덴 참사 경험
커트 보니것 주니어
커트 보니것의 전쟁과 과학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1947년 1월, 과학계는 크게 들썩였다. 세계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인 노버트 위너 교수가 군대가 지원했다는 이유로 고속 계산 기계에 대한 매사추세츠공대(MIT) 심포지엄을 취소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생물의 제어원리를 기계제어에 적용하는 신학문의 개념을 착안한 대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이 전쟁에서 자동조준 대공 미사일 제작에 이용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위너는 그 달 ‘월간 아틀랜틱’에 실은 ‘과학자의 반란(A Scientist Rebels)’이라는 칼럼에서, 군국주의자들이 잘못 가져다 쓸 법한 이론은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지식을 구하는 자에게는 누구든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과 삶의 중재자가 되었을 때에는 이 원칙을 재고해야 한다.”
토머스 에디슨의 발명과 혁신으로부터 창설해 세계 최대의 인프라 기업이 된 GE는 커트 보니것의 일터이자 SF작품의 소재였다. [GE 홈페이지]
■반전주의 과학자를 모델로 첫 소설을 쓰다
위너의 주장은 과학계 전체에 논쟁을 일으켰다. 과학자가 지식의 전파를 검열해야 하는가? 과학이 전쟁과 살상에 이용된다면 그건 과학자의 잘못인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과학자들도 논의에 빠졌다. GE는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에서부터 비롯된, 미국 최초의 산업연구기관이며 세계 최대의 인프라 기업이다.
GE의 한 홍보담당자가 유달리 위너의 주장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본래 생화학을 공부한 과학도였지만, 전쟁을 겪고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 과학자인 형 옆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 버나드 보니것은 대기과학자였고, 위너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버나드 보니것은 인공 강우의 원리를 발견한 학자 중 하나로, 구름에 요오드화은을 뿌리면 눈과 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사람이었다.
이 연구는 본디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과 수해민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군대로부터 적진에 태풍을 만들어 보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방식으로는 태풍을 만들 수 없었고, 강우량을 10% 늘리는 것이 전부였다.
동생은 형이 겪는 일을 생각하며, 위너 교수를 모델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1950년에 출간된 ‘반하우스 효과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the Barnhouse Effect)’라는 단편에서, 반하우스 교수는 정신력으로 물질을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다. 미 정부가 이를 전쟁무기로 쓰려 하자, 교수는 되려 정신력으로 핵무기를 비롯한 모든 군사무기를 파괴해버린다.
후에 반전주의 작가의 대명사가 된 커트 보니것의 첫 단편이었다.
■과학의 최전선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
형과 마찬가지로 과학도였던 커트 보니것의 정신과 인생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겪은 일로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1945년 그는 독일 작센주의 주도인 드레스덴에 포로로 갇혀 있었는데, 이곳에서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에 버금가는 학살극을 목격하게 된다. 연합군이 사흘 밤낮으로 소이탄을 퍼부었다.
도시는 불구덩이가 되었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산 채로 타 죽었다. 이 사건은 연합군 쪽의 학살극이었던 탓에 오랫동안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 체험을 바로 글로 쓰고 싶었지만 충격이 심해 집필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반하우스 효과에 대한 보고서’ 이후로, GE의 체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형태가 SF였던 것은 그의 인터뷰에 의하면 불가항력이었다.
GE 자체가 SF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순수한 과학자들이 순수한 의도로 만든 과학지식이 인류를 위협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첫 장편 ‘자동 피아노’는 보니것이 GE에서 본 기계들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로, 모든 것이 자동화된 미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피아노는 스스로 연주하고 장기(將棋)대회에는 사람 대신 인공지능(AI)이 출전한다.
정치와 경제, 사회의 주요한 결정도 AI가 내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이를 기계처럼 따르기만 한다. 결국 사람들은 AI에 밀려나 일자리를 잃고 모두 가난해진다. 당시 풍자소설로 해석된 이 소설이 지금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듯 읽히는 것은 한편 재미있는 점이다.
보니것의 네 번째 장편인 ‘고양이 요람’은 GE에서 함께 일한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천재 과학자 어빙 랭뮤어에게 영감을 받았다.
랭뮤어는 1930년대쯤에 ‘타임머신’의 작가 H.G. 웰스에게 공장 견학을 시켜준 적이 있었는데, 과학자로서 SF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싶은 마음에 ‘실온에서 고체인 얼음’에 대해 써 보라는 제안을 했지만, 웰스는 그 제안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보니것은 그 아이디어를 자신이 쓰겠다고 생각했다.
■반전주의 소설의 대명사 된 ‘제5도살장’
보니것이 드레스덴의 체험을 간신히 소설로 완성한 것은 1969년으로, 드레스덴 사건 이후 24년이 지난 뒤였다. 그가 반 자서전적인 이 소설을 SF로 쓴 것은, SF가 아니면 도저히 그 사건의 비합리를 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에 전쟁은 현실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시간상 발작 환자’다. 그는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된 뒤 과거와 미래로 발작적으로 시간여행을 한다. 이 되도 않는 설정은 되려 소설의 현실감을 드높이는 장치가 된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병사는 하염없이 집으로 시간여행을 하며, 집에 돌아온 병사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터로 끝없이 되돌아간다.
‘제5도살장’이 출간된 1969년은 미국이 2차 대전 때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쏟아 붓던 무렵이었다. 한창 베트남전 반전 시위 중이었던 청년들은 보니것의 소설을 손에 들고 시위에 나섰다. 소설 속의 말들은 유행어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휴고상, 네뷸러상은 모두 같은 해에 출간된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에 돌아갔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현재까지도 막대한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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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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