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조진우 기자
12살때 무용 시작, 살풀이·승무 대가로
부산시립무용단 수석단원 시절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뉴욕와 정착
한국무용 알리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타운홀·공립학교등서 가르치는 일 전념
한국 전통무용 무대뿐 아니라 창작 활동도 열심히 하는 이송희, 이번 여름동안 교육현장에서도 땀을 많이 흘렸다. 무용가, 안무가, 교육가로 치열하게 살고 있는 그를 만나본다.
●관객도 무념무상
폭염 속에 지치지도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동분서주하는 이송희, 지난 6월 30일부터 8월5일까지 이스트 웨스트 인터내셔널 스쿨 서머스쿨에서 3년째 사물놀이를 가르쳤다. 무용가로서 무대에 서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송희의 ‘살풀이’와 ‘승무’를 한번 본 사람은 그에게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얀 고깔을 쓰고 북을 두드리거나 정갈한 쪽머리에 새하얀 명주 긴 수건을 날리며 춤을 추는 그, 때로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태평무를 추는 그, 고결한 가하면 뇌쇄적이다. 눈에 확 띠는 미인은 아니지만 평생 추어온 한국전통무용과 현대 무용에는 자연에 대한 경모사상에 인간에 대한 예의가 깃들어 있다.
97년 12월, 이송희의 승무와 살풀이 솔로 공연 ‘업(Karma)'을 본 뉴욕타임스 기자는 리뷰에서 “승무자락이 펼쳐져 올라갈 때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을 느꼈다.”며 극찬 했다. 그는 이 신문기사로 신분문제도 해결되었다. “춤을 출 때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는 이송희. 관객도 함께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다.
●알리고, 가르치고
1997년 창립된 이송희 무용단의 공연은 우선 재미있다. 고전과 현대의 음악과 춤이 한데 어우러진 무대는 중국 현악기인 비파 때로 서양의 악기 콘트라베이스를 만나기도 한다. 그는 5년째 플러싱 타운홀 티칭아티스트이고 뉴욕한국문화원 스팟 라이트 교육프로그램 교사도 수년째 한다. 또 한국공연예술센터(회장 박수연) ‘Sounds of Korea'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그동안 브루클린 뮤지엄, 프로스펙트 팍, 앰허스트 대학, 뉴욕시립대 대학원센터, 몬타나 포크페스티벌, 멕시코 국제페스티벌 등 어디든 달려가서 부채춤, 진도굿춤, 살풀이를 통해 한국을 알리고 있다.
플러싱 타운홀 무대에서 뉴욕한인들도 수시로 만나며 공립학교, 가정상담소 호돌이방과후학교, 퀸즈한인교회에서 사물놀이, 소고, 장구를 가르치고 있다. 성인들을 위해 한미현대예술협회/한국일보문화센터 제휴 현대아카데미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쳤고 타인종 대상인 로터스 뮤직 앤 댄스 스쿨 워크샵에서 8년간 한국춤을 지도했다.
2004년 맨하탄에 ‘메디슨 애비뉴 퍼포밍 아트센터를 열어 한국무용 클래스, 국악 상설공연장을 열었는가 하면 어린이무용단인 청사초롱무용단 대표이기도 하다. 이송희가 이렇게 한국전통무용, 현대무용을 아우르는 전천후 무용수가 된 것은 탄탄한 기초에 내공이 쌓였기 때문이다.

‘바람의 춤’ 장면 (사진제공: M 스튜디오)
●“너무 재미있었다”
1958년 부산 동대신동에서 출생한 이송희는 12살인 중앙여중 1학년때 처음 한국무용을 배웠다. 남동생 둘, 여동생 둘을 둔 2남3녀의 장녀이자 대장 노릇을 하는 그를 어머니는 친구인 부산여대 교수가 하는 동네학원에 보내 부채춤을 배우게 했다.
“춤이 화려하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노래를 잘하셔 성당 성가대원이었다. 해양대학을 나와 기관장인 아버지는 배를 타시고 아이들 키우느라 더 이상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장녀인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라고, 결혼도 너 하고 싶은 때 하라 하셨다. ”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부터 현대무용을 배웠는데 테레사여고 시절, 현대무용가 남정호 선생이 프랑스 유학 후 만든 첫 작품을 받았다. 이 ‘굿바이’로 이송희는 이대무용 콩쿨에서 덜컥 상을 타버렸다.
그러나 당시 서울로 갈 형편이 되지 않아 1976년 부산여대 무용과에 들어갔다. 현대무용 전공, 한국무용 부전공으로 4년을 마친 후 부산시립무용단에 들어간 것이 이곳에서 19년 세월이 지났다. 부산시립무용단 수석단원으로 있으면서 외교사절단으로 모스크바, 베트남, 일본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매번 부채춤, 장고춤을 추던 생활이 지루해지면서 이송희는 변화를 갖고 싶어졌다.
97년 부산시립무용단의 1년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뉴욕 앨빈 에일리(Alvin Ailey) 댄스스쿨에 들어갔다. 1년 유급, 1년 무급으로 2년의 자유시간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42세에 홀홀단신 미국으로
“시간을 한시도 헛되어 버리지 않고 현대무용 테크닉, 민속춤 등을 열심히 배웠다. 1년후 그동안 배운 것을 발표해야 했다.”
그래서 부산대학 은사의 추천으로 오픈워크 한동신 대표를 만났고 많은 조언을 얻어 그해 12월 맨하탄 허드슨 길드 극장(Hudson Guild Theater)에서 ‘카르마’를 공연한 것이 새로운 길을 열었다.
“여권이 든 가방을 싸안고 잘 정도로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지 몰랐다. 발표회까지 하고나자 무급이라도 1년더 뉴욕에 있고 싶었다. 부산시립무용단 운영계장에게 전화를 하여 내가 돌아가면 44세인데 또다시 부채춤과 장구를 치면서 똑같은 생활을 해야 할까 하고 물으니 이수석, 거기서 결혼하고 더 넓은 세계를 보라고 격려해주었다. ”
그래서 1년간 받은 기본급료를 반납하고 미국에 남았다. 부산시립무용단에 팩스로 사표를 제출하면서 펑펑 울었다. 2004년부터 2년간 맨하탄에 2,800스퀘어 피트 면적의 메디슨 애비뉴 퍼포밍 아트센터를 운영할 때는 너무 힘들어 다 포기하고 싶었다.
“매달 렌트 내기도 힘들었고 여러 가지로 지쳤다. 그래, 돌아가자, 돌아가서 조용히 살자고 몇 번이나 결심했다. 아트센터 문을 닫고는 10개월간 사람도 만나지 않고 모든 스케줄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책임감을 느꼈고 약속을 지키자 싶어 전화를 하여 스케줄을 잡고 슬럼프를 탈출했다.”
이송희는 힘든 일을 이겨나가면서 2010년, 2014년 퀸즈예술위원회 그랜트도 받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델리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생활한다는데 나는 티칭만 하면서 무대에 서고 넉넉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고 살아온 것이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 티칭을 잘 하고 싶다.”
●뉴욕에서 두 번째 삶
이송희가 미국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지도 내년이면 20년이다. 늘 솔로이던 그녀는 2013년 결혼도 했다. 23년간 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정갑록씨는 혼자 있기 너무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이 통하는 친구로 다가왔다. 창작무용을 구상할 때 전체적인 그림이 저절로 머리에 그려진다는 그다.
“부산시립무용단 수석단원 시절 솔로공연 경험이 지금도 작품 구상에 들어가면 무대가 시각적으로 바로 들어온다. 거기에 편안한 자세와 편안한 테크닉으로 춤의 언어를 찾아나간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뉴왁공항에 내린 1월 8일,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비행기 문이 얼어서 안에서 대기하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갖고있던 생각을 담아 미국생활 20년 신고식을 하려한다. 내게 주는 선물이다.”
“춤은 내 삶의 일상이다. 커다란 목표나 철학보다는 일상 속에 항상 춤이 젖어있는, 팔다리를 움직여서 보여주고, 모든 춤이 삶에서 찾아지고 고민한다.”는 그다.
<
민병임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