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뉴욕한국요양원 지나 김 원장
성악 전공, 예술기획자로 명성
새벽기도중 응답 듣고 ‘봉사와 섬김의 삶’ 살기로
요양원은 노후 또 하나의 가정...노인들 임종은 꼭 지키려 노력
그는 성악을 전공한 재원이다. 최고의 예술기획자이자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지금은 진취적인 여류 사업가이자 복지사이다. 그는 한인사회에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노인복지 분야를 개척했다. 가족이 떠안기 힘겨운 노인문제를 공공분야로 끌어안았다.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는 노인 요양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더 나아가 성공적인 한국식 요양원으로 미 주류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한인사회의 자존심도 높여주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정신으로 노인 섬김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뉴욕한국요양원 지나 김(56) 원장이다.
▲새벽기도와 피아노
그는 1959년 서울 태생이다. 3남3녀의 막내다. 성격은 활달했다 리더십도 있었다. 학교 규율준수엔 엄격했다. 남자동급생이 무서워할 정도였다. 반장, 회장, 규율반장, 걸스카우트 대장 등만 맡은 이유다. 학교에서는 교사, 교감, 교장 선생님 등이 그를 수양딸처럼 여겼다. 모범생이라고 많은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었다. 권투, 배구, 테니스, 기계체조 등 각종 스포츠의 이론에 밝았다. 권투의 경우 체급별 챔피언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 그러나 피아노를 배우면서 그 꿈은 접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그 때부터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새벽기도를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서다. 피아노를 목사 사모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중3 담임교사의 권유로 예술고를 지원했다. 피아노가 아닌 성악 전공이었다. 하지만 노래 실력이 뛰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낙방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해 레슨을 받지 못한 결과였다. 그에게 예고낙방은 자존심의 상처이자 인생의 첫 고배(?)였던 것이다.
▲예술계의 화려한 활동
그는 1976년 가족이민으로 뉴욕에 왔다. 이듬해 줄리아드 음대에 들어갔다. 성악과 수석입학이었다. 유럽 유학에 나선 벨지움 왕립음악학교에서도 성악을 전공했다. 입학은 물론 졸업 성적도 1등 이었다. 그렇지만 성악가로서 무대에 서지는 않았다. 예술기획자로 나섰다. 성악보다 기획이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유학 당시 플루트 연주가 장 피에르 랑팔과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인 에휴디 메뉴인 등 전설적인 음악 거장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의 한국 공연 주선이 전 세계 상위 5%에 속하는 최고 음악가들의 프로모터로 일을 시작한 첫 작품이었던 것이다.
한인 최초로 ‘Pro Art Event, Kim International Art Management'를 설립한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미국, 한국 등의 주요 공연무대에 세웠다. 링컨센터와 카네기홀에서 한국의 뛰어난 음악가들의 데뷔도 적극 주선했다. 한국인의 예술 공연 분야에서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이다. 이런 공로로 상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그가 기존 한국 예술계의 수준을 한층 끌어 올린 일등공신이란 얘기를 들었던 이유다. 세계 음악계의 수많은 거장들을 공연무대에 세운 그는 Columbia, ICM, IMG 등 세계 굴지의 매니지먼트사와 국제계약을 맺고 초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와 만날 기회가 많았던 그는 음악매거진에 커버스토리를 쓰고 음악칼럼을 게재함으로써 성공적인 저널리스트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그가 갈 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13년 동안 새벽기도를 드렸다. 그리곤 마침내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응답의 음성은 최고 예술기획자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극과 극이었다. 사랑과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길’
그는 살아오면서 노방전도 당시를 행복한 순간으로 꼽는다. 어느 날 백인노숙자를 보고는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
그렇게 1년 동안 끊임없이 소호 지역을 다니며 거지, 노숙자, 알콜중독자, 에이즈 환자 등을 만났다. 한손엔 성경을 들고 또 다른 손에 먹을 것과 돈을 들었다. 그렇게 그들을 만나며 후회 없는 시간을 보냈다. 거지가 반길 때는 흥분하기도 했다. 믿는 자의 축복이라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우리만 누릴 것이 아니라 버려진 자를 만져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픔을 가진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며 그를 위해 할 일도 많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거지를 만났을 때 “과부와 고아를 구제해야 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는 받는 체험을 했다. 그 때는 생각이 좁고 성숙하지 못해 돈을 벌어 그들을 돕는 물질구제만 생각했었다고. 그는 음악후배들과 ‘빛으로’라는 이름의 찬양팀을 구성해 양로원, 병원, 데이케어 등에서 위문공연 사역을 했다. 그러다 용커스의 어느 너싱홈에서 중풍으로 비틀어진 백인 할머니를 만났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서 거지를 만났을 때 ‘과부와 고아를 구제 하겠다’는 메시지에 대한 영적해석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과부는 신랑인 예수를 모르는 영적인 과부다. 고아는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자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양로원 사역 등 아픔을 가진 이웃과의 나눔의 삶에 대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사명이 요양원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 13년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 바로 그가 한국식 요양원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소중한 노후를 위한 또 하나의 가정’
그는 요양원 필드를 모르는 상황에서 고민이 많았다. 무작정 버겐요양원을 찾아가 담당자를 만났다. 담당자는 기다렸다는 듯 2주 안에 비즈니스 계획서를 가져올 것을 요청했다. 쉽지 않았지만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을 작성했다. 담당자는 만족해했다.
하지만 정부와 연결된 법적인 문제를 만족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8개월 만에 카운티 허가가 나왔다. 그 때까지 무려 40번이나 미팅을 가져야 했다. 그런 절차를 통해 마침내 버겐카운티 한국요양원이 탄생했다. 2001년의 일이다. 그 탄생이야말로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함께하는 둘째 오빠의 도움 덕분이다. 그 후 4년이 지난 2005년에는 뉴욕 나소카운티에도 ‘소중한 노후를 위한 또 하나의 가정’인 뉴욕한국요양원도 설립했다. 두 곳의 요양원은 환경이 좋다. 가장 큰 기관시설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
한국정서를 고려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부모님처럼 모시기 때문에 가족 같은 살뜰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한인 노인들을 위한 거주공간과 더불어 한인 직원과 의료진이 응급처치부터 재활치료까지 책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인 노인들에게 복음과 찬양으로 남은 생애 희망을 주고, 편안한 임종을 준비할 수 있는 특수목회도 진행되고 있다.
▲‘스스로를 비우고 나누는 삶’
그는 요양원을 시작한 후 한인 노인들의 임종은 꼭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임종을 지켜보면서 끝까지 기도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수많은 임종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고 감사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삶인 영성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 편안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입주 노인들을 부르는 목소리는 밝고 명랑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소리이기에 사랑을 전하는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함이란다. 인사를 나눌 때도 꼭 손을 잡고, 포옹을 하며 뽀뽀를 한다. 스킨십을 통한 사랑실천이다. 그에게 요양원 운영의 제1의 원칙은 “또 다른 행복한 가정에서 생의 마지막을 삶의 자존감 속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하게 보낼 수 있도록 모든 스텝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베이사이드에 있는 작은 교회인 예수생명 교회에서 권사로 섬기고 있는 그는 살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2012년에는 폐암 말기로 3주 시한부 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암 치료과정에서 위험할 때도 있었다. 그는 죽음선고 앞에서 오히려 평강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을 절망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과의 싸움이 힘들기는 했지만 스스로 죽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신약이 치료에 큰 도움이 돼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헌신과 봉사는 자동으로 따라온다는 그는 앞으로의 삶은 스스로를 비우며 나눔 실천을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고 귀띔한다.
다른 삶이 노후에 정립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요양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세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는 나와 남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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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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