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뉴욕에서 때 아닌 만개한 벗 꽃을 만나고 왔다. 쓸쓸해진 정원에도 붉고 노란 장미가 활짝 피어서 오가는 발걸음을 잠시 머무르게 한다. 요즈음 겨울 같지 않은 따뜻한 날씨 덕분에 집에서 가게까지 걸어서 출근하는 날들의 재미가 늘어 간다. 남편이 일찍 가게 문을 열어주기에 가능한 일이고, 가깝고 안전한 거리여서 나름 쏠쏠한 매력에 썸을 타고 있다.
이슬을 떨구지 못한 파란 들풀들 사이에서 외롭게 인사를 건네 오는 노오란 민들레가 안쓰러워 폰에 담아 주머니에 꼬옥 넣어 주고, 한쪽으로만 바람과 맞서서일까, 옆으로 기울어진 키다리 솔나무도 햇살을 품고 동료들의 밤새 안녕을 전해준다. 아스팔트길 틈 사이로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어린싹들은 행여나 짓밟힐까, 더 좁은 틈새를 찿아 제 몸을 감추느라 아우성이다.
몇 걸음 더 내딛으면 나즈막한 돌담을 살짝 뛰어 넘어야 하고 ,부러진 가지 사이로 고개를 숙이면 찰라 같은 터널을 경험하기도 한다. 날짐승들이 숨겨 놓은 잔재들을 피해 보폭을 넓히고 귓등을 스치며 내 달리는 자동차의 소리를 응원가 삼아 푹신한 잔디밭을 지나서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과거를 조용히 묻어두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빨리 지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스스로 좀 더 편해지고자 하는 뒤 늦은 깨달음이 못내 아쉽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배려이고, 보듬어주고 ,대접해주며 ,내 안에 고유한 빛깔을 간직하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다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소홀했음에 반성이고, 지금쯤 그럴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기다리지 않았는데 또 한 살 나이가 재촉하고 있다.
나이 먹는 것이 두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젊었을 때는 아귀다툼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으나, 나이 먹으니 모든 것을 쉽게, 아니 마음이 편한 쪽으로 생각을 하고, 남보다 뒤 처질까 조바심내지 않아도 되고,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때는 왜 그랬을까 후회도 많이 한다고 하니, 지금부터라도 후회하는 일은 초병처럼 지키고 막아내야겠다.
나이 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 들여야 할 생의 필연과도 같은 것이다. 젊어서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이 행복이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생긴다는 뜻일 게다. 능력이나 성공보다는 깨달음을 사모하고, 경쟁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토닥여 주고, 섬기는 자세가 진정 나이 듦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길을 따라 걸으며, 내게 비춰진 사물들과 대화를 하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짧은 시간의 소회는 길고 깊기만 하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레임과 또 작은 두려움이었고, 가보지 않은 낯 설은 여정은 절름발이가 되어 상실을 먼저 경험하고, 생존의 날개 짓은 온전히 비상하지 못 하고, 아직도 파닥이는 꿈들로 노래하고 있는데, 한 해의 끝자락이 먼 곳에 있지 않구나. 지금까지 나와 같이 걷고 있는 주머니속에 다섯개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그 무엇으로 살아왔을 마디마디에 초연히 의미를 새기고, 과거로부터 저만치 멀어질 준비를 한다.
한 해 동안 걸어온 발걸음이 편하고 쉬운 길은 아니었어도,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붙잡고 있었음에 감사를 한다. 세계 곳곳에서는 총성과 죽음과 아우성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아직도 생명의 긴 대열 속에서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다는 시실은 기적이 아닌가. 감동과 행복한 순간은 다시 나에게 되돌아올 에너지로 저축이 되었고, 형태도 없이 떠돌던 고뇌와 어두웠던 시간들도 영원히 꽃피기를 기다리는 자그마한 소망으로 다 덮어 버렸다. 우리는 그 길 어딘가에서 스치는 바람으로, 향기 나는 꽃으로, 때로는 아름다운 노래로 시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는 것을--- 흙으로 돌아가 조용히 누워있는 자연 앞에서 은밀하게 깨닫는다.
<
고명선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