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이병헌(45)과 김윤진(42)이다. 김윤진이 미국에서 유학해 미국문화에 익숙하고 영어도 능숙한 경우라면, 이병헌은 한국에서 쌓아올린 필모그래피를 발판 삼아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고 영어연기를 시작했다.
송강호 최민식 김윤석 설경구 류승룡 이병헌 황정민 이정재 정우성 장동건 등 우리나라 영화계의 40대 이상 남자배우들은 층이 두껍다. 하지만 할리우드를 오가며 차곡차곡 경력을 쌓고 있는 케이스는 이병헌이 독보적이다.
언어의 장벽이 무색하게 2009년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이후 ‘지아이조 2’(2013), ‘레드: 더 레전드’(2013),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까지 점점 역할과 비중을 늘려가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내년에는 앤터니 홉킨스와 알 파치노가 나오는 ‘비욘드 디시트’와 동명의 서부영화 고전을 리메이크하는 ‘황야의 7인’이 개봉한다.
아직 구체적 일정이 안 나왔지만 ‘지아이조’와 ‘터미네이터’의 새 시리즈에도 출연한다.
한국영화는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로 1000만 관객을 찍었으나 지난해 개봉한 ‘협녀, 칼의 기억’은 100만도 못 모으는 쓴맛을 봤다. 그 사이 사생활 관련 구설에 올라 흥행성적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내부자들’은 이병헌이 온전히 연기력으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리트머스 시험지로 주목받은 영화다. 언론 시사회 이후 쏟아진 호평이 증명하듯, 그 누구도 쉽게 ‘배우 이병헌’의 매력을 저버릴 수 없음이 드러났다. 스크린에서 이렇게 즐겁게 노니 천상 배우다 싶다.
10년 후배 조승우도 “이병헌은 영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늘 영화에 빠져있고, 본인의 연기를 디테일하게 준비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한 컷 찍고 나면 모니터 석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배우”가 바로 이병헌이다.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은 자신이 연기한 정치깡패 안상구를, 나쁜놈인데 인간적으로 정이 가게 만들었다. 관객들이 “나쁜 깡패 새끼”를 응원하게 만드는, 참으로 영리한 배우가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백윤식이 연기한 보수 언론사의 논설주간 ‘이강희’ 역할에 마음이 갔단다. 이강희는 정치깡패 안상구와 은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대권후보를 키우는 킹메이커다. 반면 안상구는 시나리오에서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의 정치깡패로 그려져 있었다.
이병헌은 “영화광인 깡패가 복수를 꿈꾸는 캐릭터였는데, 유머코드가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사에서 안상구 역할을 제의한 상태여서,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책(시나리오)이 재미있는데, 왜 재미있을까? 문제점은 뭘까?”
그렇게 찾아낸 약점이 바로 현실적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관객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조금 덜 떨어진 캐릭터가 있어서 그 사람 때문에 쉬어가는 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안상구에게 색깔을 입혀볼까. 감독에게 제안했더니 좋다고 했다.”
이강희는 안상구를 “여우같은 곰”이라고 표현한다. 제 딴에는 머리를 굴리며 이런저런 작전을 짜지만 ‘고수’ 이강희 눈에는 수가 다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남을 절대 믿지 않은 이강희와 달리 안상구는 그래도 의리가 살아있다. 자기 식구는 끔찍이 챙기고, 한번 형제의 연을 맺은 사람에게는 마음을 내준다.
안상구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 있다. 엔터테인먼트사 사장이 된 안상구는 멋진 밴 자동차에서 잘 빠진 수트 차림에 목 베개를 한 채 내린 뒤 부하의 와이프 생일을 챙기며 케이크를 건넨다. 이어 전라도 사투리를 험하게 하면서 어디 창고로 끌려와 의자에 묶여있는 남자를 망치로 무섭게 위협한다. 미친놈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갈 때는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독한 얼굴로 흉기를 휘둘렀는데, 막상 암전된 화면이 밝아지면 반전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병헌은 “우민호 감독이 안상구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좋아한다”며 “겉멋을 중시하니까 밴을 타보면 어떨까. 목베개는 내걸 가져왔다. 원래는 망치로 손을 내리치는 걸로 돼있었는데, 안상구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지금 장면으로 바꿨다”고 귀띔했다.
“감독이 딱 하나 원한 것은 팔을 잘린 안상구가 죽은 듯 지낼 때 하고 나오는 헤어스타일이다. ‘케이프 피어’(1991)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병헌의 느끼한 미역 머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뒷머리만 붙인 가발이다.
이병헌은 이번 작품에서 유난히 애드리브를 많이 시도했다. 안상구의 대사를 새로 쓸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현장에서 자신이 상상하던 캐릭터를 떠올리며 연기했고, 필요에 따라 대사도 직접 만들었다.
“우민호 감독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고 그걸 글로써 풀어내 장면을 풍요롭게 만드는 순발력이 뛰어났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면 바로바로 신들에 적용시켜 서로 쿵짝이 잘 맞았다.”
안상구가 폭력을 일삼는 깡패지만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라는 것은 안상구의 복수를 도와주는 전직 아이돌 출신의 여성의 존재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안상구에게 복수 따위 다 접고 몰디브에 가서 모히토나 마시자고 한다.
이병헌은 “그 여자와도 멜로가 아니고 의리로 맺어진 관계”라며 “사실 우리 영화에는 좋은 사람이 없다. 누가 덜 나쁘고 더 나쁜지의 차이다. 안상구는 복수가 목표인 사람이나 복수가 실행되기까지 매일 복수 생각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때로는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는 것이며, 그렇게 삶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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