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실 (연합감리교회 뉴욕연회 여선교회장)
얼마 전 무심코 남편이 인터넷에서 골라 놓았던 옛 노래들을 듣다가 하모니카로 연주 한 “고향의 봄”이 나오자 하던 일을 멈추었다. 언제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 지는 이 노래, 막연한 그리움이 가득 차며 가슴이 설레고 얼굴에 미소가 감돌게 하는 이 노래, 가사를 음미하다 마지막 소절에서는 저절로 따라 부르고 짧게 끝나는 노래에 못내 아쉬워 다시 한 번 시작부터 부르게 되는 이 노래,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이 노래.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주 애창되는 이 노래는 1923년경 일제 강점기 때에 발표된 이원수작사 홍난파 작곡의 동요로.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이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 만큼 공감대가 크고 넓기 때문 일 것이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랑하는 이들과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늘 껴안고 살았던 그들과 자신의 의지로 이민 와 사는 세계화 시대의 우리들의 고향은 같은 곳일까?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곳에서 태어난 그 곳이 고향이라면, 이런 고향이 있는 현대인들은 얼마나 될까? 과연 현대인들이 향수를 느끼는 고향은 어디일까?
서울에서 살다 열여섯 살에 이민을 온 나는 브롱스와 스카스데일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고는 화이트 플레인즈로 이사와 35년 넘게 살고 있다. 곧 해산을 앞두고 있는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내가 살던 고향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어 함께 한국을 방문했었다. 25년 전의 일이다. 오랫동안 그리웠던 어린 시절의 집들과 채송화와 봉선화, 흰 백합과 분홍색의 장미, 빨간 칸나와 담장을 타고 올라가던 나팔꽃으로 울긋불긋했던, 내가 살던 꽃 대궐을 보고 나면 옛 추억에 그리웠던 마음이 후련해지리라 싶었다.
이민 17년 만에 방문한 서울은 놀랍게도 많이 변해 있었고,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어렵게 찾아간 초등학교 때 살던 용산구 원효로 1가 언덕위의 이층 집, 중학교 때까지 살던 종로구 계동의 신식 이층집들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곧 알아 볼 수는 있었다.
내가 바로 딸아이 나이였을 때 옆집 친구들하고 해 지도록 뛰어 놀던 곳,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던 언덕과 층계들은 그 때의 그 모습 대로여서 가슴이 뭉클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가 꿈속에서 그리워하며 “고향의 봄” 노래로 향수에 젖어보던 그 고향은 전혀 아니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뉴욕행 비행기를 탔을 때, 비로소 내 고향은 내가 어려서 살던 곳이거나 내 삶의 반 이상을 훨씬 넘어 살고 있는 이 화이트 플레인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속 깊숙이 간직된 마음의 고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내가 죽어서 돌아갈 곳, 올 10월이면 돌아가신지 8년이 되는 내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곳, 사랑의 하나님이 두 손을 벌리고 나를 반겨 주실 그 곳, 바로 그 곳이 나의 꽃 대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감사와 축복의 그 곳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고향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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