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한 역적 祖父가 추적해 처단했죠”
“일제하 집안 풍비박산 유해조차 어디 있는지 몰라”
명성황후 시해범을 일본에서 살해해 조선의 의기를 높인 독립운동가 고영근(高永根) 선생의 친손자가 메릴랜드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영근 선생은 무관 출신으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고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냈다. 특히 독립협회 해산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1903년, 명성황후 살해의 조선인 주범인 우범선(禹範善)을 추적해 죽여 조선의 자존감을 드높였다.
고영근 선생의 친손자는 메릴랜드 루터빌에 거주하는 고대진 씨(82). 고 선생은 부인인 한양 조 씨와의 사이에 3남3녀를 두었으며 둘째 아들인 고시정씨의 4남2여중 4남이 바로 고대진 씨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렇듯 고씨의 가계사도 불운한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조부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이 망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백부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내가 열한 살 때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서울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상회 점원으로 일하다 일본으로 간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고 씨가 부모님과 친지로부터 들어 기억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가까운 선대들이 일찍 세상을 떤 데다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기 때문이다.
“조부는 일본에서 6년의 옥고를 치른 후 고종의 사면 요청과 일본의 정치적 배려로 석방돼 귀국하셨습니다. 그러나 일경의 계속되는 감시와 추적으로 여주에서 갓과 망건 보부상을 하며 숨어 지내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궁중에 계실 때 친분이 있는 지인이 살고 있는 충청도 어디로 가신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조부님의 유해조차 어디 계신지 모르는 한 많은 후손입니다.”
고 씨는 한국정부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하자 2007년 조부의 항일 독립운동 공적확인을 위한 조사를 의뢰했다. 그 후 소식이 없다 2009년 진실위로부터 “동(同) 사건에 대해 2인 이상 신청 시에는 무조건 각하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다. 조부의 다른 후손이 별도로 신청했다는 뜻이었다. 서울로 달려간 그는 국가보훈처를 찾아 경위 파악에 나섰다.
“어떤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의 증손자라며 신청했답니다. 연락을 취해보니 우리 조부에 대해 이름 석 자 외에는 아는 게 없었어요. 우리는 보훈금 타려고 신청한 게 아니라 조부의 공적 확인이 목적이었기에 안타깝지만 그만 뒀습니다.”
1987년 도미해 볼티모어에서 비어&와인 그로서리를 운영했던 고 씨는 현재 글렌버니에 있는 ‘사랑의 교회’ 원로 장로로 신앙생활을 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할머님은 감리교회가 서울에 전파될 때 일찍이 신앙을 접하고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셨다는 말씀을 어머님과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 있습니다. 조모님의 신앙유산을 귀하게 여겨 현재 우리 집안의 수십 가정이 기독교단에서 봉직하고 있습니다.”
고대진 씨의 마지막 소망은 조부의 유해를 찾는 일. 일부 사료들은 고영근 선생의 후일 행적을, 1919년 고종이 승하하여 홍릉(洪陵)에 묻히자, 1921년 3월 무관의 능참봉을 자청해 무덤을 지켰으며 23년 병사해 홍릉 인근에 묻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고 씨는 “조부께서 충청도로 간 후 소식이 끊겼기에 집안에서는 모두 그 당시 암살당하지 않으셨을까 우려해왔다”며 “홍릉과 관련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며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 고영근 선생은 누구
“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
고영근은 1852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민영익의 수하로 있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눈에 들어 장단군수와 189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정2품) 등을 지냈다.
1898년 보부상들의 단체인 황국협회 부회장을 지내다 수구파들이 협회를 장악하자 탈퇴했다. 독립협회에 참가하고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추대됐으나 정부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만민공동회가 탄압받자 수구파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사전에 탄로나 피신했다.
1899년 일본으로 망명해 윤효정에게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모를 듣고 조선인 주범인 우범선 제거 계획을 짰다. 당시 히로시마 인근에 숨어 살던 우범선에 접근한 그는 1903년 11월24일 수하인 노윤명과 함께 우범선을 칼로 찔러 죽였다. 조선 남아의 의기를 드높인 장거(壯擧)였다.
우범선은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가 주도한 명성황후 시해 공작(작전명 여우사냥)에 적극 참여했으며 사체 소각 지시를 내린 인물이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그의 아들이다.
고영근은 곧 일경에 자수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 <2면으로 계속>
재판에서 그는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 즉, 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고 기개를 떨쳤다.
고종의 사면요청으로 일본에서 복역 중이던 그는 1909년 국내로 송환됐으며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홍릉의 능참봉을 자원해 무덤을 지켰다 한다. 홍릉 비문의 문구를 놓고 조선총독부와 대립하다 자의적으로 건립해 파직 당하였으며 1923년 병사해 홍릉 인근에 묻혔다고 사료들은 전한다.
우국지사 고영근의 파란만장한 삶은 작가 김원우가 장편역사소설 ‘우국의 바다’(전 6권)에서 자세하게 그려낸 바 있다. 2010년 KBS의 역사 스페셜에서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란 타이틀로 그의 삶이 방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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