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진 식
지난 목요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연주회에 다녀왔다. 이 연주회는 LA필하모닉의 정규시즌에 공식 초청된 Visiting Orchestra 중의 하나로 다음 달로 예정된 뉴욕 필하모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대여서 우리 한인들의 자부심을 더하고 있다.
서울시향은 이날 연주회에서 드뷔시의 바다(La Mer), 라벨의 왈츠(La Valse),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비창) 세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드뷔시와 라벨의 작품은 교향곡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오케스트라 악기의 역사를 보면 작곡 당시(20세기 초) 악기음향의 실험단계를 거쳐 현대 악기와 별 다를 바 없는 악기로 기술적인 완성을 이룬 시기이다. 관현악법은 브람스-바그너-차이코프스키-말러-시벨리우스-슈트라우스를 거치며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 두 작품을 연주한다는 자체만으로 대단한 도전이다. 서울시향의 관악기 연주자들이 과연 이 곡을 잘 연주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정명훈 예술감독이 서울시향을 법인화하면서 기업후원의 길이 열려 프랑스 라디오 오케스트라 단원을 비롯한 유럽의 정상급 연주자들을 관악섹션 절반의 해당하는 인원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한국의 교향악단이 갖고 있는 고질적인 관악 사운드의 불안정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였다.
연주력은 놀라웠다. 흠잡을 데 별로 없는 기술적인 완성도, 작은 프레이징 하나도 놓치지 않은 예술적인 표현력, 음악에 완전히 몰입하는 혼신의 연주는 무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아쉬운 점을 굳이 말한다면 몇 가지 아주 지엽적인 이슈뿐이다. 다이내믹스의 균형과 조절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했다면 ‘조금 여리게’가 충분히 표현될 수 있었는데, 음향이 뛰어난 디즈니홀에서는 ‘포르테’로 들렸다(차이코프스키 1악장 3마디, 라 메르 3악장-팀파니).
‘라 메르’는 지휘하기 어려운 작품 중 하나다. 길이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을 헤매는 기분이다. ‘새벽에서 정오까지의 바다 모습’ ‘파도 놀이’ ‘바람과 파도의 대화’를 교향시라는 형식에 담았는데, 전통적인 박자, 화성, 리듬에서 많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며 부분을 놓치지 않는 지휘가 쉽지 않다. ‘라 발스’ 역시 지휘하기 만만치 않은 곡이다. 기본적으로 왈츠의 리듬이지만 왈츠를 소재로 한 교향시에 가깝다. 음악구조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 난감한 곳이 많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은 앞의 두 곡이 망망대해라면, 잘 정돈된 미국의 프리웨이를 시원하게 달리는 기분이다.
정명훈 예술감독은 이 세 곡을 노련하게, 악보 없이 암보로 지휘했다. 지휘는 기본기를 토대로 원곡에 충실한 해석과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야 하는데, 나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과 해석이 가득한 지휘 동작을 그날 밤 선명하게 보았다. 때로는 거인처럼 큰 동작을 온 몸으로, 때로는 거의 지휘를 하지 않음으로 오케스트라가 알아서 가도록 하는 리더십과 예술적 감각이 돋보인 무대였다.
이 날 보여준 서울시향의 연주는 그들이 지향하는 대로 세계수준에 성큼 다가섰다. 안타까운 것은 세계수준의 뉴욕 필이나 LA 필의 경우 전문 경영인과 그랜트 라이터를 비롯한 후원 시스템이 중견기업 수준인데 서울시향의 경우는 펀드레이저가 고작 1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서울시향이 유럽순회 연주회에서 호평을 받고, 세계적 레이블 음반사에서 레코딩을 하고, 세계적 음악축제에 초청을 받는 등 세계 수준을 향해 한 단계씩 올라가고 있는 시점이다. 비영리법인 운영과 스폰서 문화에 좀 더 익숙한 미주 한인과 대표적인 한인기업들을 중심으로 서울시향을 세계수준의 오케스트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후원회를 이곳 LA에서 조직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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