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의 신곡 ‘울릉도는 나의 천국’ 발표
"울릉도 군민가 한번 불러볼까요?"
지난 7일 오전, 이장희(64)는 요즘 연습실로 쓴다는 대치동 마리아칼라스홀 객석에 기자 한명만 앉힌 채 기타를 잡았다.
"성인봉에 올라서서 독도를 바라보네, 고래들이 뛰어노는 울릉도는 나의 천국, 나 죽으면 울릉도로 보내주오,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
그가 약 30년 만에 만든 신곡인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다.
그는 두 다리로 들썩들썩 리듬을 타면서도 내내 미간은 찌푸리고 눈은 지그시 감았다. 30년간의 절현(絶絃:줄을 끊음) 후 기타를 다시 치며 굳은 살이 오른 손가락은 그가 울부짖을 때도, 휘파람을 불 때도 단단하게 중심을 잡았다.
내친김에 그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건 너’ ‘내나이 육십하고 하나일때’ ‘나는 누구인가’까지 깊은 울림으로 공간의 적막을 갈랐다.
그는 "그러고 보니 미국으로 건너가 모든 가치관이 흔들린 시련기인 35살에 작곡한 ‘나는 누구인가’(발표는 1988년)가 마지막으로 쓴 곡이었네"라며 그제야 기타를 내려놓고 기자와 마주 앉았다.
"기타를 30년간 잡은 적이 없는데 MBC TV ‘놀러와’의 ‘세시봉’ 특집에 나가면서 2주간 연습한 게 계기가 됐어요. 김민기의 학전 공연에도 서며 노래 연습이 이어졌고 기타 치는 손에 굳은 살이 생기니 아깝더군요. 요즘 기타 치는 게 아주 재미있어요."
◇"도연명처럼 자연으로…울릉군민 채찍으로 신곡" = 인터뷰 전날 저녁 이장희는 울릉도에서 뱃길을 뚫고 상경했다. 은퇴하면 하와이에서 보내겠다는 계획을 접고 바다 위에 솟은 울릉도에 몸을 맡긴 지 10여 년. 100년 된 농가를 다듬고 더덕 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꾼 터전에 ‘울릉 천국’이라 이름 붙였다.
"7-8년 전부터 울릉도 노래를 만들고 싶었어요. 지난해 MBC TV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울릉도 노래를 만들고 싶은 게 원’이라고 했더니 주민들이 저를 보면 ‘그 곡 언제 하느냐’고 묻더군요. 실행에 안 옮겨졌는데 그 말이 채찍질이 됐어요."
역시 울릉도 군민인 이장희의 대학시절 밴드 ‘동방의 빛’ 멤버 조원익(베이스)과 합주하며 기타가 손에 익을 즈음, 평리 앞바다에서 ‘나 죽으면 울릉도로 보내주오,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란 가사가 떠올랐다.
그는 "울릉도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는데 가사가 완성되니 곡은 한두 시간만에 썼다"며 "서울에 와 피아니스트 김광민을 불러내 편곡하고 합주하며 완성했다. 늙은 남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야릇한 기대감이 있었는데 반걸음은 뗀 것 같다"고 ‘허허’ 웃었다.
2003년 미국 한인방송 라디오코리아 대표직을 그만두고 이듬해 울릉도에 정착한 건 자신의 의지였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떠나온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같은 심정이랄까.
"세상사에 쳇바퀴처럼 흐르기 싫었는데 일찍 은퇴한 건 운이 좋았죠. 제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싶었어요. 1997년 도동항에 내리면서 반한 울릉도에 제대로 살기 위해 충북 괴산에 자연농업학교도 다녔어요. 봄날 밭에서 김을 매고 있자니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떠오르더군요. 돈, 명예 다 필요없고 자연으로 돌아가란…."
그의 자연예찬론은 계속 이어졌다. 중학교 시절 우이동에 캠핑을 갔다가 결석할 정도로 자연은 그를 설레게 했다. 이후 그는 남극, 알래스카, 아마존 등지를 여행하며 대자연을 마음에 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데스 밸리에는 수백번을 다녀왔다.
"’거기 왜 가냐’고 물으면 ‘울릉도에 왜 사냐’와 일맥상통 해요. 대자연이죠. ‘나는 누구인가’를 쓰면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게 뭔가’ 생각해보니 돈, 명예, 여자, 섹스, 마약, 술이 아니더군요.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대자연이었죠. 인적이 드문 데스 벨리에선 따뜻한 햇살 아래 벌거벗고 개와 함께 걷기도 했어요. 자연은 돈도 안 들고 몸에도 좋아요. 그런 자연을 사랑하는 전 행복하고요."
◇"가수에서 라디오방송 대표…뜻대로 살아" = 1975년 12월 2일. 그는 노래를 그만둔 날짜를 또렷이 기억했다. 다음날 그는 대마초 파동에 연루됐다. 1971년 인기 DJ 이종환의 권유로 1집 ‘겨울이야기’를 내고 스타가 된 지 4년 만이었다.
"젊은 날 저는 스스로 남과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대마초는 극히 일부에는 통용되던 것이기에 당시 우린 죄를 짓는다는 느낌도 없었죠. 스무날쯤 산 구치소에서 어느 날 창 밖을 보는데 눈이 펄펄 내리더군요. 이때 ‘이 시련을 좋은 계기로 삼아 완전히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이후 그는 의류 매장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지만 음악과의 결별은 쉽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그는 작곡과 음반제작에 손을 댔다. 사랑과평화의 대표곡 ‘한동안 뜸했었지’와 ‘장미’ 등을 아내, 아들의 이름으로 작곡했다. 이후 김현식의 데뷔 음반을 비롯해 김수철, 김태화, 들국화 최성원, 쉼(한상원, 정원영 등) 등의 음반을 제작하며 ‘이장희 사단’을 이뤘다.
그는 "사랑과평화의 곡들은 며칠 안 걸려 썼다"며 "연습시켜 나오니 2주 만에 스타가 되더라. 이때는 당장 스타가 되는 시대였다. 이후 김현식, 김수철 등이 찾아왔다. 한상원과 정원영은 이들이 고등학생 때 처음 봤다"고 말하며 웃었다.
1980년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캐나다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초청받아 김도향과 함께 제작자로 참석한 길에 그는 미국 뉴욕에 들렀다. 뉴욕에 내린 순간 아내도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미국에 살아야 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단다.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로즈 가든’이란 레스토랑을 열고 손님들에게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았어요. 이후 라디오코리아를 만들어 주파수를 사서 1989년 1월 15일 첫 방송을 했죠. 1992년 흑인들의 LA폭동 때는 교민들의 구조 활동을 돕는 상황실 역할을 했어요. 라디오코리아가 성공을 거두자 2003년 전파를 임대한 중국계 방송이 전파료 인상을 요구해 핑계삼아 그만뒀죠."
그 사이 그가 억누르고 있던 음악 세포를 건드린 이들도 있었다.
그는 "임병수가 로즈 가든에 와 노래 한곡을 달라더라"며 "그런 일 안한다고 했더니 간곡히 부탁하더라. 그래서 1985년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를 만들어줬다. 또 1988년 한국에 잠시 들어와 만난 한백희 씨가 김완선의 곡을 부탁해 ‘사랑의 골목길’과 ‘이젠 잊기로 해요’를 써줬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당시 그의 선택은 미국이었다.
"한국에선 이장희란 이름이 있었지만 미국에서 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1988년 KBS에서 토크쇼 제안도 왔지만 거절할 정도로 미국 생활이 좋았죠. 우리 인생은 선택이에요. 저 역시 연약하고 바보같은 사람이지만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싶었거든요."
◇"음악은 내 고향…40년 지기 덕에 날 찾아" = 그러나 지금 이장희는 다시 기타 줄을 튕기고 있다. 40년 지기 친구들 덕에 여러 직업을 돌고 돌아 창창한 시절의 자신과 마주했다.
그는 "친구들과 방송에 출연하며 잊혀졌던 ‘뮤지션으로서의 나’를 일깨웠다"며 "음악은 내게 고향이다. 음악하는 날 찾아 행복하다. 1975년 중단하며 못다한 노래를 이제 불러볼까 한다"고 밝혔다.
10월께 방송에서 자신의 콘서트를 계획 중이며 이를 위해 틈틈이 연습도 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꼽은 음악 지기들은 많다. 삼촌 친구였던 조영남을 비롯해 세시봉에 함께 섰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과 김민기, 조동진 등이다.
그가 한국에 잠시 들를 때면 MC 이상벽, 사진작가 김중만, 개그맨 전유성까지 한자리에 모여 40년간 유대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
"민기는 제가 한국에 오면 호텔 방을 잡고 미니바를 거덜내며 새벽까지 술을 먹는 술벗이었죠. 저도 이 친구들도 40년 전과 똑같아요. 영남이 형은 여전히 실없고, 세환이는 천진하게 잘 웃고, 창식이는 이치에 안 맞는 말을 하고, 민기는 별로 말이 없죠. 사람은 변하는 게 아닙니다. 껄껄."
그의 말처럼 방랑벽도 떨칠 수 없는 고질병이다. 최근 네팔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다녀온 그는 다음 주 미국을 거쳐 프랑스에서 한달간 보낼 예정이다.
"여러 나라에서 살며 문화 체험을 하고 싶어요. 와인을 연중 320일 넘게 마실 정도로 좋아해 이번 프랑스 행에선 보르도, 부르고뉴 등지를 돌며 와인 투어를 해보려고요. 참, 저 부자 아닙니다. 은퇴 때 집을 팔았고, 이번엔 미국에 있는 건물도 팔 참이에요. 저금통장 하나 없습니다. 하하."
마지막 귀착지는 역시 울릉도다.
"라디오코리아를 경영할 때 경비원을 둘 돈이 없어 개를 한 마리 키웠어요. 16년간 키우다가 울릉도에서 죽어 양지바른 곳에 묻었죠. 저도 그 옆에 묻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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