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부터 김연아까지...렌즈안에서 살아숨쉬죠”
뉴욕타임스 이장욱 기자, 그의 이름앞에는 항상 퓰리처상 2관왕이라는 타이틀이 붙어다닌다. 9.11 사진으로 언론인의 최대 꿈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9.11 10주기가 돌아오는 요즈음, 그는 명성, 지위에는 초월했다. 언제나 현역이고 싶은 골수 사진기자, 그를 만나본다.
“찰칵”
사진기 셔터 소리에 전율이 인다, 파르르 떨리는 감이 온다, 이장욱 기자(43)는 카메라와 함께 한 삶을 이렇게 말한다.“나한테 사진 찍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고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그가 찍는 사진은 남다르다. 남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도 신문에 나온 사진 속 주인공은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인다.그동안 9.11사진은 물론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지진, 시드니와 나가노, 북경 올림픽, 뉴욕 필 평양콘서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피겨퀸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밴쿠버 동계올림픽 등의 사진을 17년간 찍어왔다.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사진들을 찍으며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닌 그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진과 이야기는 기가 막힌 백일야화가 나올 정도다‘는데 수많은 사건현장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리아바드 난민 수용소를 취재했을 때다. 2001년 12월이었는데 허허벌판에 흙으로 지은 움집에서 태어난 지 15일된 신생아를 재우고 있는 엄마를 촬영했다. 뉴욕타임스 매거진 커버에 실린 후 유니세프 같은 곳에서 수용소로 구호물자가 쇄도했다. 기사가 나간 며칠 후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난민들이 맨발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내 앞으로 마구 달려왔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고마움을 표시하려 달려오는데 그순간 기분은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 이장욱 기자는 힘든 현장 취재의 보람을 찾는다.
사실 사진 찍은 것는 금방이고 별로 힘들지 않다고 한다.“가장 힘든 것은 현장접근이다. 사건이 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현장까지 급히 가도 때로 며칠이 걸린다. 접근금지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거나 쓰나미로 인해 다리가 끊어져서 갈 수 없을 때 가장 속이 탄다, 그래도 어떤 방법이든 찾는다. 어쨌든 가야하니까. "고 한다.이장욱은 워낙 매사에 포기를 모른다. ‘안되면 될 때까지 밀어붙인다. 워낙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다른 어려움은 없다’는 그에게 바위같은 든든함과 한가지에 몰입하는 순진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9.11 10주기가 다가온다
이장욱 그와는 아무래도 9.11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2011년, 9.11 1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그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회사에서 9.11 10주년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준비 중이다. 회사측에서 내는 기획안을 함께 하기도 하고 내가 낸 기획안이 채택되면 혼자서 진행하기도 한다.”2001년 당시 맨하탄 다운타운에 거주하는 그는 TV에서 불타는 트윈타워를 보는 순간 2대의 캐논 D200 디지털 카메라와 400mm 망원경을 챙겨 무조건 달려갔다. 사우스 타워가 무너지고 자욱한 연기 속 노스타워도 세컷 찍자마자 내려앉았다. 먼지 자욱한 속에 무너져 내리던 트윈 타워 사진으로 속보사진(breaking Story)부문 ‘테러리스트의 뉴욕 공격과 그 후“로 동료 12명
과 함께 퓰리처상을 받았다.또 아프가니스탄 전쟁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사진은 기획보도(Feature Story)부문에 동료 3명과 상을 받아 2002년 한해에 퓰리처상 사진보도 2개 부문을 동시 수상했다.
“전쟁의 참혹한 실상보다 그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 더 놀랍고 아름답다.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을 많이 한다.” 이장욱이 뉴욕에 온 것은 1986년이다.“아버지가 선장 출신이고 부산에서 자랐는데 고등학교 시절 무전여행을 많이 다녔다. 뉴저지 사는 이모가 카메라를 보내주어 찍기도 했지만 그때는 사진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뉴욕에 이민 와서 낮에는 형과 함께 노동일을 하고 야간에는 버겐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던 중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뉴욕대학교 사진학과로 편입했다.
학창시절 3년간 추적한 95세 홈리스 여성의 삶을 다룬 그의 프로젝트는 LA타임스가 LA폭동 1년후 특집으로 8P나 실을 정도였다. 1994년 6월 뉴욕타임스 인턴을 시작하면서 쟁쟁한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그의 사진 55컷이 신문에 게재되자 별명이 ‘토네이토’가 되었고 인턴 4개월만에 뉴욕타임스의 최연소 정식 사진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30여명의 사진기자 중 단 3명인 시니어 기자 중 한명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
뉴욕대를 수석졸업 했지만 졸업하고 나서 몇 달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식당에서 일을 할까 했지만 오빠는 사진을 평생 찍을 사람인데 지금 그 일을 하면 다른 사람의 직업을 뺏는 것이 된다, 우리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아내가 말했다.” 생계가 걱정인데 통크게 남편을 다독거린 부인 박설빈(41)씨는 맨하탄 이스트빌리지 SB갤러리 디렉터로 가난하나 재능있는 화가들에게 전시회를 열어주며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에서 이장욱 사진 개인전도 두 번 했다. 2008년 12월 ‘이씨의 이야기’ (His story)는 취재현장을 담은 700점의 사진이 디지털 슬라이드쇼로 진행되었고 2010년 4월 두번째 개인전인 ‘두 번째 기회’는 개인적인 시련과 어려움을 뚫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6인의 이야기였는데 2010년 POYi(Pictures of Year International) 상
을 수상했다.그들 사이에는 아들 지오(7)가 있다.
“아이가 없을 때는 같이 출장도 많이 갔다. 백호랑이 태몽을 꾸고 지오를 낳았는데 돌잔치에서 카메라를 잡아 모든 사람들이 좋은 덕담을 해주었다”는 박설빈씨는 남편 이장욱씨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사람이 달라진다. 금방 소개받은 사람 이름은 기억못해도 사진에 관한 한 언제 어디서 상황이 좌르르 나오는 것이 놀랍다”며 웃는다. 그는 요즘 리비아 사태와 일본 지진 등 세계적 사건 현장과 잠시 비껴 있다.“전쟁터에서는 잠시 위험하지만 내내 위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은 24시간 걱정을 한다.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지금은 아이가 너무 어리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에디터보다 영원한 사진기자로 있고싶다”는 그는 요즘 부동산 섹션에서 맨하탄 업타운 거리풍경과 리빙인 파트를 맡고 있다. 웨스트 70가 일대를 찍은 그의 사진(4월10일자 뉴욕타임스 부동산섹션 리빙인)은 복잡한 거리를 바삐 지나는 인파의 밝고 편해보이는 미소에서 그 거리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양한 직업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는 것이 재미있다”는 이장욱, 그는 늘 피사체를 기다리고 있다.명성, 지위, 상 이전에 더욱 소중한 것은 그에게는 삶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도 매일 매일 사진을 찍는다. 그것은 자신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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