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과거와 현재,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차이나타운 스튜디오 작품 앞에서 말하는 강익중씨.
■ 금요기획/삶, 그리고 이야기
뉴욕 7번 전철 메인 스트릿 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 신시내티 어린이 병원, 세계정상 G8회담이 열린 독일 하일리겐담 평화의 벽, 한국 두 대통령이 서거한 현대사를 지켜본 광화문의 복원 가림막 등, 큰 이슈가 있는 곳에는 늘 강익중씨의 설치작이 있다. 이 엄청난 작품들을 언제 다 만드는 것일까. 밥은 언제 먹고 잠은 언제 자는지 못내 궁금한 그를 집과 스튜디오가 같이 붙어 있는 차이나타운 펜트하우스에서 만났다.
‘8~6 출퇴근’샐러리맨처럼 작업에 파묻혀
백남준·김향안 두 스승 화가정신 체득
한국·미국 오가며 벽화작업 어린이에 꿈을
■화가는 60부터
“화가로서 이루는 시기는 나이 60부터다. 앞으로 10년 남았으니 더 열심히 하겠다. 매번 벼랑 끝에 서있는 마음으로 흐트러지거나 느슨해짐을 다잡고 다지고 있다.” 강익중씨는 오전 8시면 작품을 시작한다.
맨해턴 바워리와 첼시, 차이나타운에 있는 3개의 스튜디오 중 하나에서 어김없이 일을 시작하고 오후 3시께면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집에 온 후 점심을 해 먹인다. 그는 스파게티, 탕수육, 짬뽕, 돼지고기 부추만두를 만드는 요리솜씨가 좋다.
그리곤 다시 작업실로 가서 오후 6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샐러리맨처럼 지키는 이 작업시간은 전시회를 앞두고는 며칠씩 밤을 새운다.
“화가는 매일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잘못 그리더라도 그리고 기뻐도, 배고파도, 졸려도 그린다. 아는 것을, 쉬운 것을, 옆에 있는 것을 꾸준히 그린다. 게으름 핀 날은 아내가 먼저 눈치 챈다.”
85년 결혼하여 그의 작품 활동에 적극 내조하고 있는 변호사 이희옥(영우부동산개발회사 파트너)씨는 남편의 얼굴이 환해서 집에 들어오면 싫어한단다. 열심히 그리지 않고 놀다 오면 얼굴이 활기차고 그림에 기를 다 빼앗겨 피곤에 절어 오면 열심히 그렸구나 좋아한다고.
■미국에 돈 벌러 와
1984년 홍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프랫 아트 인스티튜트로 유학 온 강익중씨는 “미국에 그림으로 성공하겠다기보다는 돈 벌려고 왔다”고 장난스럽게 히히히 웃는다.
“조선 최고 문인화가 강세황과 강희안의 17, 18대 손으로, 어렸을 적에 증조할머니의 영정을 보고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큰아버님이 우리 집안에 강세황 같은 어른이 나타났구나 하며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홍대에 들어가니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전업작가가 되리라고는 그때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
“처음 몇 과목만 등록하고 유학을 명목으로 뉴욕에 왔다. 케네디 공항에 아침에 도착했는데 택시 운전수가 나를 속여 여기저기 돌다가 프랫 브루클린 기숙사 앞에 내리니 오후 5시, 막 기숙사 문을 닫더라. 그래서 롱아일랜드 대학 브루클린 기숙사 룸메이트로 들어가야 했다. 택시비로 수백달러를 지불하고 나중에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히히히”
속고도 웃고 마는 그의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아, 이래서 그림을 그리는 구나’ 할 정도로 순박한 심성에 사물을 맑고 바르게 보는 예술가의 눈을 지녔다.
“뉴욕에 오자마자 주중에는 식품점, 주말에는 케네디 공항 근처에서 옷 장사 등 하루 12시간 잡역 일을 했다. 델리가게, 시계행상도 했다. 옷가게 점원생활 9년을 하고 나니 가격이 눈에 훤해 지금도 옷을 사 입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버스, 전철을 타는 출퇴근 3시간 동안 시간을 아끼고자 3인치 그림을 개발한 것이다. 가로 세로 3인치 미니 캔버스에는 다인종 다문화의 기호와 만화적 이미지, 콜라주 등이 각양각색으로 들어간다. 빛과 소리도 첨가된다.
빌리지 보이스 한 면에 그의 작품 평이 ‘작은 것이 모여 태산을 이룬, 세상을 흡수하고 찍어대는 강렬한 첫 인상을 주었다’고 났다.
■백남준과 김향안
그는 미국에 와서 좋은 스승 두 사람을 만났다. 백남준, 김향안 선생이다. 백남준씨는 강익중씨 표현으로 ‘30세기에 별을 보는 분’으로 1994년 휘트니미술관에서 2인전 ‘멀티플 다이얼로그전’을 시작으로 백남준 3주기에는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후 2인전을 했다.
1,003개의 TV 브라운관이 탑처럼 쌓인 백남준의 ‘다다익선’ 주위를 6만2,000여개의 캔버스가 둘러싼 강익중의 ‘삼라만상’이 펼쳐져 서로 연결되어 소통한다.
90년 소호에서 열린 천안문 사태 모금 전시회에서 처음 만난 백남준, ‘나보다 더 크고 잘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전생에 내 아들’이라고 위해 주었다.
휘트니미술관 전시회 후 강익중은 날개를 달았고 작품 속 붓다가 영어를 배우고 초컬릿을 먹고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위트와 농담도 넘쳐났다. 그래서 관객은 행복하고 즐겁다.
백남준은 1981년 개인전 작품 중 하나로 TV 브라운관 유리판에 물감으로 낙서하듯이 ‘사기(史記)를 읽느라고 십오년을 보냈으나 아직도 전도요원(前途遙遠), 내 생전(生前) 마칠지나 모르겠으나 그래도…’라고 적었다.
강익중씨는 그 작품을 중고 TV 틀에 넣고 사기 두 잔을 채널처럼 앞에 붙인 공동작품으로 재탄생시켜 집의 거실 한 옆에 두고 늘 백남준, 그를 기린다.
또 한 사람 김향안은 화가 김환기씨의 부인으로 ‘익중아, 앞으로 살면서 세 가지를 꼭 지켜라, 아침을 꼭 먹어라.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고 팁을 많이 주어라, 기회와 유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어린이에게 희망을
199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은 강익중씨, “상을 탔지만 뭔가 고갈되고 허전했다. 지구촌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전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공공 프로젝트 시작 동기를 말한다.
한글을 작품 속에 넣은 것은 10년 전이다, 세 살난 아들 기호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치기 위해 크게 글씨를 쓴 것이 계기이며 요즘은 주로 조국 산천,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다.
2007년 ‘2010 상하이 세계 박람회’에 세워진 한국관을 ‘강익중 글씨체’ 한글과 단청색으로 꾸며 건축 디자인 부문 실버메달을 타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는 명성을 얻는 만큼 주어지는 부를 사회로 환원하고 있다.
“조국은 항상 그립고 도움이 되고 싶다. 그래서 희망의 프로젝트를 계속한다.”
미 신시내티 어린이 병원, 충남대 희망의 벽 등 병원 5군데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도서관, 경기도 미술관 벽화 등에 어린이 그림과 공공미술 프로젝트 10군데를 완성, 어린이의 꿈이 담긴 벽화를 만들었다. 3월 중순에 그는 다시 울릉도와 백령도, 마라도, DMZ를 찾아가서 벽화를 설치한다.
“광화문 복원 가림막을 다시 손질하여 마라도에 세우고 싶다. 과거 왜구의 침입이 들어온 그 곳에 우리민족의 상징을 세워 일본의 기운을 막고 싶다”는 것이 그의 요즘 소망이다. 그는 백남준에 이어 미국 칼솔로우 화랑 소속이자 독일 알렉산더 화랑 전속으로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에서 수시로 ‘강익중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강익중씨가 말하는 작가란 어떤 사람일까.
“달항아리 안이 텅 비어 있듯 파이프도 안이 텅 비어 있어야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작가는 자음과 모음이 만나듯 아래 위가 만나 하나가 되는 연결자 역할을 해야 한다. 작가가 아집에 차 있으면 파이프가 막힌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동과 서를, 남과 북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되고 싶다. 내 안에 있는 안테나를 밖으로 뽑아 안과 밖을,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 이 시대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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