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은 나의 고등학교 선배다. 또 모교의 재단이사장을 지내셨다. 그래서 동창회 관계로 가끔 가까이서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968년 동창들 가운데 언론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만 모여‘혜화클럽’이라는 것을 만든 적이 있는데 말단 기자인 내가 총무를 맡아 심부름을 하고 추기경께서는 그 모임의 고문이었다. 그때 클럽모임에 나와서 언론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 기준은 무엇인가. 양심의 소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박정희 정권시절) 교회와 언론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권력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언론과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은 성격이 매우 인자하고 온화한 분이다. 무엇을 청탁하면 거절을 못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강단에 올라가면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교회나 사회 문제에 관해 언급할 때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한국이 많이 발전하고 세계 어디를 가나 알아주지만 국민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를 않아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코리아의 위상이 아슬아슬 하다고 했다. 국민의 가치관 정립이 경제발전과 병행 되어야 선진국이라는 것을 그는 항상 강조했다.
LA에 오셨을 때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더니 받아 주셨다.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더니 사람이 달라졌어요. 개혁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몸으로 시범을 보여야 하는데 아들들이 말이 많잖아요? 그리고 바른 소리하는 사람 멀리하고”라면서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이민사회의 지표를 물었더니 “코리언은 정직하다. 이것만 미국인들 사이에서 소문나면 돼요”라며 웃었다.
동창회 관계로 화제가 옮아가자 추기경은 “모교 건물을 강남으로 옮기면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물어왔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학교는 전통이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지키며 닦을 생각을 해야지 땅장사도 아니고 왜들 전부 강남으로 학교를 옮기려고 하는지 몰라. 옳지 않아요”라고 했다.
재작년 12월 모교 창립 100주년 기념식이 열려 서울에 나갔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눈에 띠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독감이 심해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없는 모교 100주년 기념식은 너무나 허전해 보였다.
“양심의 소리에 따르라”고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부터 양심의 소리에 따르려고 애쓴 이 시대의 등불이었다. 정의구현 사제단도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격려 했으나 민주화 된 이후 친북 경향으로 흐르자 이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그래서 이들로 부터 “김수환 추기경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지도자”라는 비난까지 받아 마음의 상처가 컸지만 김 추기경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랐다.
그는 항상 자신의 생활이 신앙과 일치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뇌한 겸손한 종교인이었으며 한국 사회가 중심을 잡는데 지난 40년간 주도적 역할을 한 시대의 나침반이었다.
서울 대교구장 시절 그의 방 앞 복도에는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 합니다. 은혜스런 말 한마디가…”를 새겨 놓은 목각현판이 걸려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금언이지만 김 추기경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면서 방을 드나들 때마다 쳐다보며 마음에 새긴다고 했다.
크리스찬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은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가 있어 이 시대의 양심의 소리를 대변할까. 김 추기경님,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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