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풀라 대표인 트레이시 박(오른쪽)씨가 LA 다운타운 꽃시장의 꽃 도매업체인 메이예쉬 홀세일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루가 시작하는 짙푸른 새벽녘에 부산한 발걸음으로 신문을 돌리는 한국일보 황인수 배달원. 〈이은호 기자〉
창간39돌 - 새벽을 여는 사람들
일상의 톱니바퀴에 닳아버린 우리의 자화상은 왠지 애처롭다. 하루를 열어 젖히기 위해 두꺼워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자동차 액설레이터를 힘껏 밟는 은행원 김씨의 모습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달콤한 아침 단잠의 유혹을 이겨내고 새벽을 여는 이들도 있다. “아침 공기 참 좋겠다”는 기름섞인 말잔치는 치열하게 삶을 가꾸는 그들에 대한 경솔한 실례다.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새벽부터 밥을 짓는 주부부터 남들의 건강을 챙겨주기 위해 운동화끈을 동여매고 나서는 테니스 강사, 밀린 숙제를 하느라 이른 새벽부터 공부에 발동을 거는 학생, 뜨거운 열기를 마시며 빵을 구워내는 제빵사 등등… 이들 중에서 어둠과 싸우며 거리를 헤매는 신문배달원과 태양빛에 더 화사한 빛을 발하는 꽃을 새벽부터 공수해 오는 플로리스트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그림자와 빛이다. 바쁜 일상에 지친 그대여, 더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일보 배달원 황인수씨
“벌써 10년 이젠 익숙
맑은 공기 마시면서
돈 받고 운동하는 셈”
LA 한인타운에서 한국일보만 10년째 배달하고 있는 황인수(63)씨. 그는 하루에 잠만 두 번 청하는 하루가 이틀인 남자다. 오전 9시에 한 잠 자고, 저녁 7시에 한 잠 또 자고… 누구는 이런 그를 보고 “팔자 좋다”고 할 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하루에 한 번 자도 거뜬한 이들과 달리 황씨의 하루는 그야말로 토막잠을 청해야 할 만큼 바삐 돌아가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한 이들을 뒤로 한 채 황씨는 밤 11시 집을 나선다.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새벽에 일하는 데 몸이 이제 적응이 돼서…”였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도 몸으로 체득한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인쇄공장에 도착한 황씨의 눈은 바빠진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읽는 세상 돌아가는 일이 빼곡히 적힌 신문을 집어드는 것은 황씨가 새벽에 일하는 자그마한 특권이다. 공장에서 신문을 정리하는 황씨의 손놀림은 그 누구보다 능숙하다. 포개진 신문들을 나누는 일이 손에 익은 지 오래인 황씨에게서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다.
황씨는 한인타운 내 우편번호 90005지역 배달을 맡고 있다.
새벽녘 황씨의 친구는 고독한 사람들이다. 바삐 발걸음을 떼는 황씨보다 밤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시큐리티 가드들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황씨를 더 반긴다. 하지만 신문배달 시간이 더욱 앞당겨지며 황씨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그립다고 말한다. “지금보다 신문배달 시간이 늦었을 때는 사람들이 신문을 보고 해주는 말도 들을 수 있어 좋았어.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과거에는 배달시간이 일정치 않아서 난감한 경우도 적지 않았지”라며 “그래도 지금이 일하기 좋은 편”이라며 지난 10년 새벽 거리를 회상했다.
어스름히 먼 곳에서 아침의 향기가 풍겨오는 새벽 5시 신문 배달이 끝나간다. 황씨는 “힘들다고 말하면 더욱 힘들다”며 낮과 밤이 바뀐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맑은 공기 쐬면서 돈 받고 운동하는 셈”이라고 크게 한 번 웃으며 마지막 신문을 7가와 킹슬리에 위치한 아파트에 떨어뜨려 주고 고단한 하루를 마감했다.
플로리스트 트레이시 박씨
“고객위해 발걸음 재촉
생기 넘치는 꽃시장서
삶의 에너지 충전하죠”
황씨의 신문 배달이 끝나갈 무렵인 새벽 5시. 또 다른 누군가는 새벽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두컴컴한 거리를 헤매는 대신 화사한 꽃들에 둘러싸인 채 더 나은 꽃을 고르기 위해 바쁘게 눈과 손을 돌려댄다. 그 주인공은 한인타운의 꽃집 ‘라풀라’의 대표인 트레이시 박씨.
지난 2002년부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꼬박 LA 다운타운 꽃시장에 출근도장을 찍은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벽 다운타운 꽃시장에서 만난 박씨가 꽃집을 옮겨다닐 때마다 여기저기서 반가운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키무라 홀세일의 음재영 사장은 박씨를 가리켜 “가장 고급 꽃만 찾으시고 가장 많이 오신다”며 새벽 공기보다 부지런한 박씨에 혀를 내둘렀다.
함께 일하는 직원을 시켜도 될 법한데 굳이 새벽마다 힘든 걸음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씨는 “한인타운에 플라워샵을 오픈하고 나니까 결혼식 꽃 주문양이 많아지는 등 찾는 분들이 더 많더라”며 “많은 고객들의 애정을 받는 만큼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고 더 좋은 꽃을 골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LA 다운타운 꽃 시장의 하루는 새벽 2시부터 성황을 이룬다. LA 인근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는 이들 중 더 좋은 꽃을 더 일찍 찾으려는 부지런쟁이들은 전날부터 전화를 해 놓고 필요한 꽃을 점찍어 놓기도 한다. 다운타운 꽃시장에는 네덜란드, 에콰도르 등 전 세계에서 수입된 1,000여종 이상의 꽃이 누군가의 얼굴에 기쁨을 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날 박씨의 손놀림은 어느 때보다 더 바빴다. 칼스테이트 노스리지 대학의 졸업식 덕택에 꽃을 찾는 이들이 평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어 프롬 시즌부터 시작, 졸업식과 결혼식이 많은 4월부터 6월까지가 또 다른 시즌이라고 말했다.
1988년부터 전문 ‘플로리스트’로 활동해 온 박씨는 새벽은 하루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사람의 손길로 꾸며낼 수 있는 장식은 부차적일 뿐 꽃, 그 자체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순간은 좋은 꽃을 선택해 내는 이른 새벽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침대에서 자는 순간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다운타운 꽃시장을 볼 때마다 하루의 힘이 솟는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루가 나태해 질 수 있겠어요?”라고 반문하며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는 그 상쾌함이 좋은 꽃을 고르는 손길을 다듬어주는 비결이라고 털어 놓았다.
<이석호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