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총영사관 <2>
70~80년대 본국 격동기 공관도 몸살
1970년대 중반 LA 한인사회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요구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총영사관은 소위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며 보이지 않는 대립각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되고, 이후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 그리고 다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 속에서 새로운 정부의 당위성을 강변해야 하는 곤욕 아닌 곤욕을 치러야 했다.
74년부임 박영씨 반정부 인사들과 긴장
무골호인 박민수씨 한때 한인회에 대립
실세 총영사 황광한씨 곤욕 치르기도
외교 연구원 연구관으로 근무하다 1974년 6월 부임한 박영 총영사는 두달 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격을 받고 숨지는 사건을 맞았다. 그는 즉각 관저에 빈소를 마련하고 한인들의 조문을 받았다.
박 총영사에 대해 한인들은 고지식한 성격으로 본업에 충실했던 인물이라고 기억했다. 당시 차상달, 김상돈, 이용운, 김신찬, 홍동근씨 등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세력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공관 내부에서는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으며, 임홍규 영사 등과 함께 한인회관 매입사업 등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그의 뒤를 이어 1976년 6월 부임한 박상두 6대 총영사는 전임 박 총영사에 비해 부드럽고 유연하고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성격은 껄끄러운 사이였던 한인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매달 정기적인 모임을 갖자는 언론인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 이임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박 총영사는 임기가 끝난 뒤 외무부 의전국장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강단에 서기도 했다.
박민수 7대 총영사는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 서야 했던 인물이다.
<박민수 총영사가 자신의 관저에서 발생한 권총 강도사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해외공관장에 대한 안전문제가 대두됐다.>
1979년 7월 부임(1983년 1월 이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10.26 사태가 발생했고, 전두환 정권의 탄생까지 지켜봐야 했다.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고, 이를 신군부가 무력으로 강제 진압한 사실들이 속속 본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LA한인사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한인들은 즉각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총영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또 그해 10월에는 김상돈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남가주 국민회의가 김대중 선생 구명운동을 벌이는 등 한국에 대한 민주화 요구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때문에 박 총영사는 이같은 반정부 분위기를 가라 앉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였고, 그만큼 부담도 적지 않았다.
언론인 출신인 민병용 미주한인재단LA 회장은 “70년대 후반기에는 한국정부에서 파견된 정보기관 사람들의 위세가 대단했었다”면서 “심지어 LA한인회장 선거까지 간섭하며 반정부 인사로 지목한 모 인사가 회장에 당선돼서는 안된다는 얘기까지 공공연하게 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말했다.
올드 타이머들은 훤칠한 키에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를 ‘무골호인’이라고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비록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한인사회와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한인회 비하발언으로 관계자들의 분노를 사 멱살을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했던 김명균 한인회장은 곧바로 여권을 압수당하고 모처에서 사건상황을 진술해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또 박 총영사 재임기간에 한국에서 발생한 이민휘 회장 외환관리법 위반 사건이 LA타임스에 보도되면서 연방 국세청(IRS)이 LA한인회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 세무자료가 전무하던 한인회 관계자들이 5년치 자료를 만드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그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또다른 사건은 1980년 8월 소형 요트 파랑새 호의 태평양 횡단 축하연에서 한국정부의 축사가 다름 아닌 전두환 보안사령관 명의로 돼 있어 한인들이 그의 권력을 실감하기도 했으며, 1981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의 첫 LA 방문을 앞두고는 일부 지도급 인사들이 ‘전두환 바람’을 일으켜 달라는 총영사관측의 끈질긴 요청에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한 인사는 “당시 총영사관은 물론 다른 정부 파견기관들의 직원중 상당수가 중정 출신이라고 보면 될 정도였다”면서 “이들은 전 대통령 방미가 임박하자 직접 만들어 놓은 환영사를 타운 유명인사들에게 보여 주며 협조를 강력히 요구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그 내용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이 결국 시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며, 남북이 여전히 대치상황인 만큼 국방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결국 신군부 출현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총영사 본인으론 1982년 6월 21일 아침에 발생한 권총강도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을 줄 모른다. 이 사건은 박 총영사가 출근을 하기 위해 관저 옆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향하던 중 숨어있던 흑인 권총강도가 나타나 위협사격을 가한 뒤 차를 강탈해 도주한 것. 이 사건으로 인해 공관장에 대한 안전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됐다.
전두환 대통령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시절인 1983년 1월 황광한 8대 총영사가 새로 부임했다.
예비역 준장이었던 그에 대해 한인들은 적지 않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 모두 여지없는 ‘군인’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자신이 신군부의 주체세력임을 암암리에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여자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큰 상처를 입고 물러난다.
훗날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는 변창환씨는 “황 총영사는 ‘그때의 일로 인해 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면서 한인사회에 대한 서운함도 없어 보였다”고 전했다.
김기수 9대 총영사(1985년 10월-1989년 2월)는 무난한 성격을 가진 외교관으로 한인사회와도 별다른 불협화음 없이 지냈다.
특히 그의 재임기간에 현재의 총영사관 건물 매입이 완료(1988년 10월22일 입주)됐으며, 오렌지카운티 순회영사 업무가 시작됐다. 그는 또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지원활동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우정의 종각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 유치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정부의 예산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불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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