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고 얼클한 해장국은 지방에 따라 다른 특산물을 넣어 향토음식으로 발전했다.
한국에만 유일하게 있는 ‘해장국 문화’
주재료 선지는 철분.단백질 풍부 원기회복에 좋고
콩나물 뿌리의 아스파라긴산 성분은 알콜을 분해
옛날 노동 집약적인 시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술로 시달린 숙취는 해장국으로 해소 하였다.중국이나 우리와 식생활 문화가 유사한 일본도 해장국 문화가 없으며, 전 세계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국물민족이라 할 만큼 습성(濕性)음식이 많은 우리 민족은 [임원십육지(林圓十六志)]등 고서(古書)에 나오는 탕반(湯飯)류 만도 무려 58종이나 된다.
술을 마실 때 나오는 탕이 술국이오, 술에 시달린 속을 풀어 주는 게 해장국(解腸羹)이다.해장국의 해장이라는 말은 해정(解?) 숙취를 풀다는 말이 와전되어 해장(解腸)이 되었다고 하는데, 해정(解?)이나 해장(解腸)이나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그러면 해장국은 언제부터 먹기 시작 했을까?
해장국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고려말엽(高麗末葉) 중국회화교본(中國會話敎本)인 [노걸대(老乞大)]에 성주탕(醒酒湯)이 나온다. “육즙(肉汁)에 정육(精肉)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川椒)가루와 파를 넣는다.”고 기록 되어있다. 이 해장국이 일반 백성들의 음식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후기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 광주성내(廣州城內)의 효종갱(曉鐘羹)이 나온다. “광주성내에 이 국을 잘 끓인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버섯, 표고버섯, 쇠갈비, 해삼, 전복을 토장(土醬)에 섞어 종일(終日)토록 푹 곤다. 밤에 이 국 항아리를 솜에 싸서 서울에 보내면 새
벽종이 울릴 때 재상(宰相) 집에 이른다. 국 항아리가 아직 따뜻하고 해장에 더 없이 좋다.”라고 되어 있다.효종갱은 재상들이 크고 작은 연회를 마친 후 술로 시달린 속을 다스리기 위해 시켜 먹던 최초의 배달 음식인 것으로 추측 된다.
충청북도 중원군 금강 나루터에는 해장 떡이 있었다.
이 해장떡은 50년대 중반 금강대교가 완성되기 전 나룻배나 고무다리위로 강을 건너던 공주 전막이라는 금강변 주막에서도 팔았다.새벽 여명이 걷히기도 전 이고지고 수 십리를 걷거나 달구지에 짐을 싣고 5일장을 보러 나오는 사람들이 강을 건너기전 나루터 주막에서 시루떡 한 접시와 철에 따라 무청 시래기나 아욱, 근대 등에 토장을 푼 토장국과 막걸리 대포 한잔을 곁들인 것이 금강 해장 떡이다. 새벽에 댓바람에 장(場)에 나오느라 아침식사도 못한 장군(場群)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해장거리다.
해장국하면 대부분 펄펄 끓은 뜨거운 국물을 연상한다.그러나 해장국이 뜨거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냉 해장국(冷解腸羹)으로 동해안에서는 차가운 물회가 있으며, 목포의 콩물도 해장국으로 먹는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파도와 싸우며 어군(魚群)을 찾아다니며 시달리다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선창으로 나와 술집을 찾게 되고 이때 등장하는 안주가 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회다.회를 안주로 하여 술을 마시다 취기가 돌면 얼큰하게 회 무침을 하고 일어 설 때 찬 얼음물을 부어 물회를 만든 후 이를 훌훌 마셔 시달린 속을 달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고 한다.
물회도 지역에서 잡히는 어종에 따라 그 종류가 다르다.주문진과 포항은 오징어물회, 속초는 가자미물회, 제주도는 자리돔물회, 전복물회등 다양한 물회가 있다. 목포에 가면 새벽마다 콩물로 해장하기 위해 콩물집 앞에 문전성시를 이룬다. 단백질이 풍부한 콩물은 위에 부담도 주지 않고 술로 시달린 속을 달래 주며 원기를 회복하는데 더 할 수 없는 훌륭한 해장국이다. 열 해장국(熱 解腸羹)은 육즙성(肉汁性), 초즙성(草汁性), 어즙성(魚汁性)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해장국하면 콩나물해장국이오, 콩나물해장국하면 전주와 진주를 연상케 한다.전주는 쥐눈이 콩이라 불리는 서목태(鼠目太) 즉 콩나물 콩이 유명하다.
서목태는 일명 논두렁콩이라고도 불릴 만큼 논두렁에서 잘 자랐고 김제평야를 비롯한 호남평야의 넓은 논두렁은 서목태 재배의 최적지였다.생산량이 많으면 소비량도 늘려야 했으며, 이런 지역의 특산물은 그 지역 나름의 향토음식등이 발달하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한다.전주지역 뿐만 아니라 전북 음식에 콩나물을 많이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해장국’이라는 향토음식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설에 전주지역은 물에 철분이 많아 풍토병이 자주 발생하여 전주부사가 콩나물로 풍토병을 치유한 후 전주의 각종요리에 콩나물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조선시대에는 중국으로 청심환의 원료로 수출까지 했다고 하는 귀한 약재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서목태는 옛날부터 전주의 8미(8味) 또는 10미(10味)에 들어가는 특산물 중에 특산물이었다.콩나물은 뿌리의 아스파라긴산 성분이 알콜을 분해 하는 작용을 한다 해서 해장국으로 더 알려져 있다.
전주의 콩나물해장국집은 하루에 3백 그릇 이상 더 팔지 않았다 해서 붙여졌다는 ‘삼백집’과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손님이 벌 떼처럼 왱왱하며 몰려온다는 것과 이집 주인이 이씨라서 ‘왱이집’이라 붙여졌다는 두 집이 약 50여년 동안 콩나물해장국집을 해온 오래된 집이다. 전주의 콩나물해장국집에는 모주(母酒)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막걸리에 찹쌀가루, 흑설탕, 감초, 생강, 계피, 대추, 인삼 등의 한약재를 넣고 끓여 알코올 성분은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모주 재료는 모두 해장에 좋은 것들로 해장술로 불리는데 감기몸살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 모주에 대해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쓴 [조선문화총화]에 따르면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대비가 광해군 때 폐위되자 어머니인 노씨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배급해주는 양식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동네에서 술지게미를 얻어서 싸구려 술을 만들어 팔아 생활 했다. 이 술을 처음에는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 해서 ‘대비모주(大妃母酒)‘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대비 자(大妃 字)를 빼고 모주라고 부르게 됐다’고 적고 있다.진주의 콩나물해장국은 국물이 맑고 시원하다.
북어, 마른새우, 디포리(남해안에서 나는 국물 내는데 쓰는 멸치의 일종), 다시마, 대파, 양파, 마늘, 양배추, 무, 사천 서포의 바지락 등을 따로 끓여 국물을 만들어 여기에 사골국물, 콩나물 삶은 물을 섞어 다시 살짝 끓인 다음 준비해 둔다.상에 낼 때는 뚝배기에 고두밥을 말고 살짝 익힌 콩나물, 바지락을 넣고 육수를 부어 팔팔 끓이다가 다진 파를 올려 낸다.팔팔 끓는 뚝배기에 입맛에 따라 새우젓(삼천포육젓)과 매운 양념을 가미하여 먹으면 맛이 한결 좋다.
콩나물 따로국밥은 뚝배기에 따로 콩나물해장국과 밥이 따로 차려 나온다. 서민들의 해장국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선지해장국이다.
콩나물과 배추 시래기를 넣고 덩어리 선지를 넣은 선지해장국이야말로 해장국 중에 으뜸일 것이다.선지는 철분과 단백질이 풍부해 주독을 풀어주고 지친 몸에 활력을 준다. 특히 단백질이 분해 돼 생기는 한 종류가 숙취해소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선짓국에는 비타민과 무기질, 펙틴, 등 식이성 섬유가 풍부한 우거지와 콩나물과 같은 야채가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해장국으로는 아주 좋은 음식이다. 옛날에는 소나 돼지를 잡는 백정들의 삯을 돈이나 곡물로 지불해 주는 것이 아니라 소나 돼지
의 부속물 즉 머리, 다리, 꼬리, 내장, 선지 등을 주었고, 백정들은 이 부속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특히 내장과 선지는 신선한 그대로 조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도축장에서 멀지 않은 인근에 부속물을 이용한 음식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박제가[‘북학의]에 보면 “통계를 보면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국가의 제사나 호궤(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成均館)과 한양 5부(部)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고 기록 , 유 본예의 [한경지략]에 ‘시전’ 현방(懸房)조에 보면 “현방(懸房 -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이다. 고기를 메달아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 하는 것이다. 도성 안에 모두 23곳이 있다. 현방을 ‘다림방’이라고 하였다. 경성(京城)안에 오현방(五懸房)이 있었는데, 그 중 ‘수표교 다림방’이 규모가 제일 컸다고 하며 [경성어록(京城語錄)] ‘별건곤(別乾坤 )’ 1929년 9월호
에 보면 “수십년 까지도 있었다.” 고 기록되었다.
모두 반민(泮民)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게 하고 세(稅)로 내는 고기로 태학생(太學生)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한양 성곽 십리 안까지는 한성부의 관활 하에 두었다.성안과 한성부 관할 안에 23~24곳의 푸줏간이 있었으니 당연히 그 부속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이 있었을 터 성균관 주변 반촌과 멀지 않은 무교동 등지에 헌종(憲宗) 임금이 사복차림으로 드나들었다는 무교탕반 집, 청계천 수표교 다리 건너 수표탕반집, 백목다리 옆의 백목탕반집, 청진동 선지해장국집 등이 있었으며, 종로통과 제기동 주변의 설렁탕집과 마장동 함경도 사람들이 장사하는 가리국밥집 등이 있었다. 인천의 해장국 효시는 1883년 개항과 함께 항구건설과 화물출입으로 많은 서양인들과 조선의 일꾼들이 몰려와 서양인들 때문에 많은 소를 잡게 되고 등심과 안심은 서양인들이 가져가고 남은 잡육과 뼈를 국으로 끓여 이른 아침 일터로 나가는 조선인 일꾼들의 허기를 채우는 해장국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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