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환목사(뉴욕새빛교회)
사람이 아닌 꽃이나 나무에게도 그 성품을 짐작케 하는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특별히 꽃은 다른 식물에 비해 그 점이 더욱 뚜렷하다. 장미는 색깔부터가 고혹(蠱惑)스러워 남녀 간에 교환되는 꽃으로도 십상인데 연애하는 남자가 장미꽃 대신 다른 꽃을 보낸다면 기대하는 효과
는 반감될 터이다. 그러나 예배당 단상에는 아무래도 장미보다는 백합이나 히아신스 또는 국화류에 그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가난한 문사(文士)가 백지 위에 정한(情恨)을 토로하는 곁에는 까다로운 난(蘭)이 고고(孤高)한 태(態)를 드리워야 제격이고 지조가 사라진 이즈음에도 매화는 서릿발 같은 교훈을 마지않는다. 지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느 분은 병아리 떼가 물고 다니는 개나리조차 철딱서니 없는
꽃이어서 일별(一瞥)하기 조차 싫다고 말한다. 개나리는 그 가지를 꺾어 아무데나 꽂아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을 반드시 화품(花品)으로만 본다면 화색(花色)이 뛰어난 꽃의 시샘을 어찌할까.
문득 일어나 창밖을 보니 가을 빛깔이 완연한데 이 덧없는 시간의 흐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도대체 어디쯤 서 있을까 생각한다. 꽃이나 나무로 치면 나는 어떤 과수(果樹)일까. 오래 전 어느 운명론자가 객기 흐르는 나를 보고 호(號)를 선사했는데 그 호가 백강(柏崗)이었다. 잣나무 울창한 산이 되라는 설명이었지만, 아무리 훑어보아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백(栢)을 일(一)로 삼아 일강(一崗)으로 사용한다. 하나의 산, 자못 정적이 감돌지만 위인의 품세로 보아 격이 어긋나지는 않는 듯하다. 하나의 산에서 열리는 열매가 무에 그리 많으랴만 그래도 깃들인 꽃과 나무가 있으니 분에 넘쳐 족하리라.
불과 수 삼 년 전만 해도 못 말릴 만큼 성정이 화급하다는 평을 들었으나 요즘에는 곁에 있는 지인들조차 너무 느슨해졌다고 불평이니 세월이 주는 매가 아프긴 한 모양이다. 어쨌든 벌써 생의 반환점을 훨씬 넘겨 종착역을 저만큼 보고 있으니 앞날의 계획보다는 낡은 추억을 꺼내 들 때가 많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이순(耳順)은 되어야 한다는 선배들의 깨우침이 마냥 틀리지 않음을 짐작한다. 이 나이가 되면 “내가 오래 살았구나” 보다는 “이제 얼마나 더 살 건가”로 생각이 바뀐다는 말도 있지만, 미리 서글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예일 대학의 레미슨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오십 줄을 넘겨서면 자신이 속한 모든 분야에서 혹시 필요가 반감되고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잔잔한 절망감이 엄습할 수는 있다.
‘신세대’와 대조적인 세대가 ‘쉰세대’라는 조크도 있지만 인생의 꽃인 40대가 붙잡을 새 없이 지나가고 쉬어터진 50대 조차 간과(看過)했으니 가을을 걸어가는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다. 이제는 올라갈 일은 없고 내려갈 일만 남은 셈인데, 올라갈 때 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
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모쪼록 잘 내려가 목적지에 안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말도 있다. 10대 20대는 시간이 가지 않아 성화이고 30대는 어느새 세월이 가는 것은 느끼게 되며 40대는 정말 빠르구나, 아쉬운 마음으로 살고 50대는 성큼성큼 세월이 스쳐 지나가다가 어느새 60대가 되면 그때부터 세월은 느낌도 아쉬움도 계산할 새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자고 나니 70이고 돌아누우니 80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짧은 생조차 가을날 쪼이는 오후의 한줌 햇볕만큼 남겨두었으니 삶의 분수령(分水嶺)을 운위할 여지도 바이없다.
금년 가을 하늘은 유난히 높아 보인다. 하여, 이번 가을은 지난 어떤 가을보다 하나님의 세미(細微)한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싶다. 인생도 한 포기 꽃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어떤 꽃으로 키우시기를 원하셨을까? 정말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못 다한 풍요로움을 이 가을에 드리고 싶다.
가을은 결코 조락(凋落)의 계절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별리(別離)를 재촉하기 보다는 기억하게 하시는 신의 무거움과 교감하기를 소망한다. 무기력과 겸손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저렇듯 가을 하늘은 높은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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