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두부의 종주국’
고려 때 송나라나 원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절간 음식으로 만들어졌다가 어떤 형태로 전해 내려왔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밀가루로 면 만드는 법을 응용해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었던 것처럼 두부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고려 말 성리학자 이색의 [목은집] 대사구두부내항라는 제목의 두부를 예찬한 시(詩)가 우리의 두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 시 내용을 보면 중국은 양락을, 우리는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조시대 세종실록 16년은 1434년 섣달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박신생(朴信生)이 명나라 황제로 부터 세종에게 보내온 천자의 칙서에 조선임금이 일전에 보내 준 찬모들은 모두 정갈하고 음식을 맛깔스럽게 조리하니 음식중에서 특히 두부가 정미(精味)하다고 칭찬하면서 다시 찬모 열명을 뽑아 보낼 때는 특히 두부 만드는 솜씨를 익히게 한 다음 사신이 오는 편에 함께 보내 달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종 원년 2월에 제향과 공상 음식으로 이용되는 두부의 가공 과정에서 위생 문제와 응고제에 대한 대화가 나온다. 문종 원년[1450년]에 간수 이외에 산수의 사용을 거론하였고, 1500년 초에 석고 등 다양한 응고제를 사용하고자 했다고 기록되었다.이 기록으로 보아도 당시 조선의 두부 제조기술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때부터 릉(陵) 옆에는 조포사(造泡寺)를 두어 메주와 두부 등 능에 제사를 지낼 때 올릴 제수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매년 5월이면 임금은 곳간을 열어 이 조포사에 콩을 보내 메
주를 쑤고 장을 담그게 하여 진상케 했으며, 사대부가에서도 콩을 가까운 사찰에 보내 메주를 쑤게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 보면 두부의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언이라 생각하여 따로 포라 하였다. 여러 능원(陵園)에는 각각
승원(僧園)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 승원을 조포사라 하였다.
그러나 공사문서에 포라고 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포(泡)란 물거품이라 음식이름으로는 부적당하다. 여러 능원에는 각각 승원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승원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사문서(公私文書)에 두부를 포(泡)라고 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그리고 녹두의 유(乳)를 황포(黃泡)라고 하고 혹은 청포라고 하는데, 공사문서에 이렇게 쓰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조포사로 봉선사(奉先寺) 등이 있다. 어쨌든 우리는 고구려 때로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콩을 이용해 두부 만드는 기술은 고려 때 상당한 수
준이었다. 조선시대 두부의 종류를 보면 중국은 세가지 정도이고, 일본은 다섯가지인데 반하여 한국의 두부 만드는 법과 종류는 수십가지이다. 일반두부와 더불어, 새끼로 묶어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단단했던 막두부, 처녀의 고운 손이 아니고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 콩즙 끓일 때 약간 태워 탄내를 내는 탄두부, 굳히기 전에 먹는 순두부, 속살을 예쁘게 한다는 약두부, 명주로 싸서 굳히는 비단두부, 삭혀 먹는 곤두부, 기름에 튀겨먹는 유부, 얼려 먹는 언두부 등 두부의 종주국이라 할 만큼 다양한 두부가 있었다. 1611년에 쓰여진 허 균(許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창의문(彰義門) 밖 사람이 두부를 잘 만들며 연하고 매끄러운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1827년 서유구가 저술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는 1554년 어숙권(魚叔權)이 쓴 [고사촬요(攷事撮要)]를 인용하여 단단한 두부를 행주(行廚)두부라 하며 콩을 깨끗이 씻어 가루를 내어 묽은 죽처럼 물을 넣고 세포(細布)로 걸러 찌꺼기를 없앤 다음 끓는 물에 삶아 낸다. 간수를 넣고 냉각시켜서 응고하기를 기다린다. 또는 큰 세포 주머니에 싸서 생강, 초(椒), 청장을 넣고 삶아 낸다. 먼길 떠날 때 준비하는 두부이다라고 기록 하였다. 1800년 작가 미상이 쓴 [박해통고(博海通攷)]라고도 불리는 [군학회등(群學會騰)]이나 1830년에 최한기(崔漢綺)가 쓴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콩을 침지하여 물을 더해 가면서 맷돌에 갈아서 얻은 즙액(汁液)에서 찌꺼기를 걷어 낸 두유(豆乳)를 가열하여 간수를 넣어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나 중국의 두부는 매우 단단하다. 그러나 일본의 두부는 콩을 맷돌에 갈아서 바로 가열한 다음 찌꺼기를 걷어내 두부가 연하다. 일본에 두부 제조기술을 전해 준 이는 박호인으로 일본의 두부중에 탕엽(湯葉)이 있다. 이 일본의 탕엽은 1740년대 이표(李杓)가 쓴 [수문사설]에 기록된 두부피(豆腐皮)다. 두유를 넓적한 냄비에 붓고 가열하여 표면에 생기는 피막(皮膜)을 건져내어 만드는 요리다. 이렇듯 우리의 두부 만드는 다양한 기술은 일본으로 전래된다.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朝鮮常識)]에 보면 일본의 두부는 임진왜란중에 적의 병량(兵糧) 담당관으로 와 있던 강부야량병위(岡部冶郞兵衛)란 자가 조선에서 그 제조법을 배워 갔다고 하기
도 하고 혹 이르기를 진주(晋州) 싸움에서 경주성장(慶州城將) 박호인(朴好仁)이 증아부원친(曾我部元親)에게 붙들려 가서 토사국(土佐國) 고지(高知)에서 두부업을 시작한 것이 근세 일본의 두부제조업의 권여(權與:시초)라고 하기도 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두부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박호인 말고는 잘 못 전해진 내용이다.
필자가 2001년 6월 재일교포가 경영하는 일본 오사카의 마당이라는 야끼니꾸 요리집 조리사 교육을 간 적이 있었다. 이때 시가(滋賀) 현립대학 인간문화학부 정대성(鄭大聲) 교수를 학교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정 교수가 선물로 전해 준 그의 저서 [식문화(食文化) 중(中) 일본(日本) 조선(朝鮮)]에 박호인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일본 체류기간을 며칠 더 연장하고 일본의 두부집을 몇 군데 찾아 보기로 했다. 일본의 모멘고시두부는 바로 우리의 전통적인 막두부라고 불리는 행주(行廚)두부다.
우리의 비단두부인 니시끼두부(錦豆腐), 언두부인 고오리두부(氷豆腐), 순두부인 구미두부(汲豆腐), 로꾸조(六條), 덴가구(田樂), 고마두부(胡痲豆腐), 구르미두부(胡桃豆腐)등 덴메이 2년에 쓰여진 [두부백진(豆腐白珍)]에는 무려 230여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식생활사]에서 일본의 두부가 가마쿠라시대 쇼진요리에 등장했다고 하나 일본의 코지(高知) 현립도서관에 소장된 [카이잔슈(皆山集)] 9권에 두부에 관해서 어떤 책에 전해 오기를, 옛날 이 나라에는 두부가 없었다.
1592-95년 중에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조선의 포로들을 끌고 이 곳으로 돌아 왔을때, 그 중에 박호인(朴好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손 역시 이 나라에 살았는데, 이곳의 영주 야마노치 카즈토요(山內一豊)공이 코치성을 쌓을 때, 박씨를 지금의 토진마치(唐人町)에 두고 부렸다. 토사군 카가미가와(鏡川)의 북쪽 당에서 두부를 제조하기 시작 했다. 즉 오늘날의 아키즈키(秋月) 모시의 조상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두부를 만든다고 하지만 이곳의 두부에는 미치지 못한다. 두부 점포가 68호 이상 증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라고 기록 되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본 간사이지방에 아키즈키(秋月)라는 성을 가진 세대수가 무려 7,000여 세대가 된다. 아키즈키의 시조가 누구인가? 그가 바로 박호인의 아들 아키즈키 쵸지로((秋月長次郞)로 불리는 박원혁(朴元赫)인 것이다. 아키즈키 쵸지로의 관명은 쵸자에몬(長左衛門)이다. 그러면 여기서 일본 두부의 명문 아키즈키 가계(家系)를 살펴 보기로 하자.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만8,7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토사(土佐)에서도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1592년 2월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시코쿠에서 일어난 군세력과 함께 웅천(熊川:지금의 진해시 웅천동 왜성<倭城>)에 상륙하여 조선 군사와 싸웠다. 당시 쵸소카베의 참모인 요시다 이치사에몬 마사시게(吉田市左衛門政重)와 맞붙어 싸운 조선 군사는 바로 진해현감의 증손자 박호인이었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사는 패하고 1593년 6월 화의가 성립되어 휴전으로 일본군은 철군하고 29일 쵸소카베는 진주(晋州)를 거쳐 토사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갈것은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에 기록된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호인은 경주성장이 아니고 진주현감의 손자이며 진주성에서 싸운것이 아니라 지금의 진해인 웅천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쵸소카베는 1597년 다시 출병해 다음해 3월18일 일본으로 돌아 갈때, 경동(經東) 등 조선의 장인 30여명과 함께 박호인을 데리고 일본의 우라도 성(浦戶)의 나가하마(長濱)에 상륙한다. 박호인은 일본 게이슈(藝州:히로시마)에서 두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중 아들 하나가 아키즈키 쵸지(박원혁)다. 12세에 토사에 와서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시동이 되는데, 시동이 되려면 일본인이어야만 가능했다. 박호인은 일본군에게 패하였으나 두부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서 쵸소카베 모토치카로부터 일본으로가 두부를 만들어 줄것을 제안받고 그와 담판을 하게 된다.
담판할 당시 입회인이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함께 4번 부대의 큐슈(九州)에서 출병한 아키즈키 타네나가(秋月種長)였다. 이런 인연으로 아키즈키가 박원혁을 양자로 삼기를 언약하고 야키즈키의 가호를 주었으며, 종(種)자 하나를 나누어 주어 아키즈키 쵸지로타네노부(秋月長次郞種信) 하타 타네노부(秦種信)이라 했다.
한편 박원혁은 일본에 머물며 관명을 쵸자에몬(長左衛門)이라고 불렀다. 토사국 코치시 케라(介良) 마을 촌장 아키즈키 우마스케(秋月馬助)는 아키츠키 쵸지의 7대손이다. 케라 마을의 신사에는 한국의 제사 때 병풍에 붙이는 지방(紙方)을 간판처럼 걸어 놓고 있다. 증조고 통훈대부 진해현감 부군 신위(曾祖考通訓大夫鎭海縣監府君神位) 증조비 숙인 박씨 신위(曾祖 比 淑人朴氏神位) 조고 통훈대부 주부 부군 신위(祖考通訓大府主簿府君神位) 조비 송씨 신위(조 比 宋氏 神位) 외조고 생원 윤행(外祖考生員尹 行) 외조비 조씨(外祖 比 趙氏) 현비 숙인 윤씨 신위(顯 比淑人尹氏神位) 萬歷 13년 4월3일 부 박호인 효자 박원혁 만력 13년은 1585년이다. 박 호인은 당시 진해현감의 증손자로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본에 두부 제조기술을 전해준 박호인과 그의 아들 박원혁은 일본의 두부 원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동방삼국에서 두부를 제일 잘 만들었고 중국이나 일본등에 두부 만드는 기술을 전해 주었으나 한국은 두부 만드는 법이 불과 몇가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일제 36년동안 한국에서 생산한 콩의 전량이 공출되어 기름을 짜 전쟁에 이용되었고 콩깨묵은 우리에게 식량으로 배급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두부 제조 기술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된다. 이제 우리도 두부의 종주국으로서 자긍심을 갖기 위해 두부에 관련된 연구를 계속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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