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히브리성경과 신약을 통틀어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약에서 제일 나중에 쓰여진 책은 아니다. 그 저자는 1세기 말엽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해안의 외딴 밧모섬(Patmos)에 살고 있던 요한이라는 사람이다. 그를 사도 요한이며 또 제 4복음서와 세 편의 요한 서신의 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방 세계에서는 2세기 이후에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였지만, 희랍어를 사용하던 동방교회가 이것을 정경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요한계시록이 신약의 희랍어 판에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와 11세기에 이르러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의 묵시이긴 하지만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일곱 개의 초대교회에 보낸 편지다(1:4). 그러나 그 내용이 난폭하고 어수선하면서도 장엄한 환상과 상징적 표현으로 가득해서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 건지 종잡기 어렵다. 오죽했으면 16세기 개신교 지도자들마저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었을까?
요한계시록의 전통적인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이 장래에 일어날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읽는 방법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이런 각도에서 읽고 믿는 많은 기독교인들마저도 여기 표현된 상징적이고 난해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이, 앞서 말한 것처럼, 일곱개의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이었다는 사실은 바른 해석을 가능케 해준다. 밧모섬의 요한이 1,9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어나지 않은 먼 훗날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그 편지를 받았던 당시의 초대교회 사람들에게는 아무 뜻도 의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할 리 만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편지 속에는 특정한 크리스천 공동체에 보낸 메시지와 함께 요한계시록의 비전도 담겨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편지 속에는 장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이 곧 일어나리라고 믿었던 가까운 장래의 이야기였지 21세기에 와서까지 미래로 남아 있는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서한은 고도의 상징성과 고대의 우주전쟁 신화 등을 활용하여 초대교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또 당대의 로마제국을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로 13장 18절의 ‘666’이라는 숫자는 ‘네로 황제’를 일컫는다든지 17장의 ‘일곱개의 산’은 로마 도시를 상징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및 그들의 지배에 대한 종교적 합리화 등에 대한 신랄한 고발인 것이다.
오리건 주립대학교의 종교학 교수인 마커스 보그의 말을 빌려보자.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의 비전은 역사적 요소뿐 아니라 역사를 꿰뚫는 요소도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재결합이 에덴에서 시작된 인류의 방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눈물 방울이 하나도 없을 것이고, 생명의 강이 그 가운데로 흐르고 있으며, 거리에는 생명 나무도 자라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이보다 더 멋지게 끝맺음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끝>
이 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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