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송정 푸른 물
박 정 현
여름이 중턱에 걸렸다. 더위에 헉헉 하기도 하고 아이들 학교 개학이다 준비다 하고 설치기 바쁘기도 하며 심신이 축 늘어질 만도 한 때이다 그래도 이 여름을 그대로 넘길 수는 없다. 마음을 가다듬고 찾아가고픈 데가 있다. 갈 수가 없으면 마음으라도 간다.
나의 사무실 벽에는 내가 몇 년 전에 찍은 아담한 풍경사진이 하나 있는 데 한번 보기만 해도 옛날 가곡의 한 구절이 절로 흥얼거려지는 그런 경치를 담고 있다. "일 송정 푸른 물은 홀로 늙어 갔어도...". 나는 이 풍치있는 사진을 북가주 해안선가의 어느 주립 공원에서 찍었는데 그 풍경은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망망한 태평양을 굽어보는 절벽 가에 일 송정, 한 그루의 소나무와 그 푸른 물을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 볼 수 있는 공원 벤치 하나가 있다. 그 소나무는 키가 쭉쭉 뻗은 미국의 예사 소나무가 아니고 동글동글하고 아담한 한국식 소나무와 흡사하다. 나는 그런 소나무를 미국에 한 십년이나 살고 난 후에나 처음 봤는 데, 그 세월이 야속하리 만큼, 마치 고향 친구나 만난 듯이 반가웠던 생각이 난다.
경치도 경치려니와 그런 소나무가 드리운 벤치가 벼랑 끝에 홀로 놓인 모습은 바로 한 폭의 그림이요 한 수의 시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치가 있고 정답기조차 했다. 나는 그 장소를 곧바로 나의 비밀의 피크닉 장소로 삼고 북가주 해안지방으로 갈 때마다 찾아보곤 한다 (그 공원 이름은 비밀(?)이므로 밝힐 수 없음). 그 소나무 그늘아래서 망망한 바다의 찬 자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잠시라도 멍하니 앉아 있노라면 마음은 어느덧 산수같이 맑아지고 고향에 온 듯 아늑해진다. 한국의 동해 바다가 저 물가 너머로 보일 듯도 하다. 아니 어느덧 동해 바다 어디쯤 온 듯도하다. 고향 닮은 한 그루의 소나무가 가진 위력이 신기로웁다. 그 벤치를 설치한 어느 미국인도 고향 바다를 떠나온 사람일까, 아니면 소나무가 좋아 시 읊는 자연인일까...
얼마 전 아동 극작가 주평 선생이 쓰신 "그 바닷가 그 파도 소리" 라는 제목의 수필을 읽으며 나는 여기 마음에 바다를 채운 이가 또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나의 조그만 바닷가의 소나무 있는 언덕을 생각해 보았다. 그 바닷가 그 파도 소리 - 그 제목만 보아도 정말 한국 남해안 어드메 있는 작은 항구도시 바닷가의 파도 소리와 뱃고동 소리, 짭짤한 바닷내, 갈매기떼 날개 펄럭이는 소리 등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모두가 얼마나 그리운 마음인지도 느껴진다. 주평 선생은 지극히 개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수필 한 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 준 것이 아닐까. 그의 수필부터 맨 먼저 한눈에 읽은 것은 물론이다...
바다를 가슴에 지니고 사는 사람은 속이 넓고 행복한 사람일지 모른다. 바다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한없이 힘차며 마냥 모습이 달라지는가 하면, 이 세상 언제 어디에서도 변함없는 모습이다. 바다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 마음을 포용한다. 바다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바다를 찬미한 가곡과 예슬화가 그리도 많은 것은 이 때문일까?
나는 그 조그만 나의 비밀 장소를 잊지 않고 가 본다. 기쁠 때도 가고, 슬플 때도 가고, 무엇보다 마음이 피로할 때에도 가 본다. 그리고 언제나 신선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나는 지금 간절히 달려가고 있다. 더위에 지치고 온갖 불미한 일들이 우리 가슴에 먹칠하고 있는 이 나날에...
나의 신선한 마음은 곧바로 아이의 평안한 정서요 가족의 화목함이다. 바다가 있어 산다. 그 끊임없는 파도에 실려 조각배처럼 떠나볼 수 있어 언제나 바다로 돌아간다. 바다에 가 봐야지. 일 송정 푸른 물을 찾아서, 여름이 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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