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의 대선 정국을 지켜보자면 문득 ‘세비로’ 정장에 고무신을 신고 대로를 활보하던 해방 직후 ‘명동 신사’가 떠오른다. 정녕코 어울리지 않은 품새를 일컬어 "갓 쓰고 구두 신은 격"이란 말도 있다. 바로 한국 정가에서 목하 벌어지고 있는 민주적 선거 형태가 보여 주고있는 모습이 딱 그렇다.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를 당 대의원들이 직접 뽑는다는 것은 매우 민주적인 방식이다.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를 낙점하던 과거와는 생판 다른 방법이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집권 민주당이 벌리고 있는 이른바 ‘국민경선제’는 미국의 프라이머리나 코커스를 본 딴 것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더 발전한 형태다. 배심원을 뽑듯 컴퓨터를 동원 해 지역 주민(비당원)을 무작위로 선정, 경선 투표에 참여시키는, 보다 민주적인 방법을 채택한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위장된 민주제도"라는 게 관전자들의 논평이다.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선정된 주민들의 절반도 대회에 나오지 않아 사표(死票)가 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반 주민의 경우 매표를 위한 현찰 찌르기와 향응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이다. 미국 예비선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국적 후진성이다. 역시 민도에 문제가 있고, 이를 악용하는 후보들의 탈법에 더 큰 문제가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당내 경쟁자간에도 뜨거운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은 경선이 몰아온 가시적 정치 발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무늬는 민주적이지만 속은 영 딴판임을 알 수 있다. 민주당 경선 장면만 해도 그렇다. 당초 민주당내 권노갑의 동교동 구파로부터 확고한 지원 약속을 받고 느긋한 표정을 짓던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돌풍에 휘청대면서 경선판은 이전투구장(泥田鬪狗場)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비민주적 진흙탕 싸움으로 변모한 것이다.
막후의 ‘큰손’, 즉 DJ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탓이라며 이인제 측이 반발, ‘노무현 죽이기’로 전략을 바꾸면서 일은 벌어졌다. 최근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이인제 진영의 ‘색깔론’ 공세는 이인제-권노갑-DJ로 연결되는 당 주류 연형 구도가 깨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인제 진영의 색깔론 공세는 곧 DJ의 이념 칼라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할 공산이 크다.
이러니 싸움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한데 공격수나 수비수 모두 논리적이고 격조 갖춘 논쟁이 아닌 감정과 우격다짐 그리고 뻔뻔한 말 뒤집기와 교묘한 빠져나가기로 일관하고 있다. 일례로 이인제 측은 노무현 후보가 과거 불법 노동자 파업장에 나타나 재벌해체를 주장하고 주식을 노동자에게 나눠 주어야한다는 등 사회주의 좌파적 발언을 했다고 공격했다. 또 주한미군 철수 시위에도 참가해 연대 서명을 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 답변은 얼렁뚱땅 식이다. "현장 논리라는 게 있다. 시위 현장에선 좀 과격한 표현을 쓰는 것 아니냐"라든가, "그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다르다"라는 식이다. 그 스스로 진보 개혁파임을 자랑하고 있다면 왜 좀 더 떳떳치 못할까. "그렇다. 나는 노동자 편이다"라든가, "남북화해가 된 만큼 주한 미군은 나갈 때가 됐다"고 딱 부러지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가? 당내 보수파와 본선에서의 득표를 노려 본래 색깔에 덧칠을 하고있는 것일까? "위장 발언"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인제 후보도 마찬가지다. "권력 따라 이 당 저당 기웃거린 해바라기 철새 정치인"이라는 공격을 받자 그는 "당시 나는 구국적 일념에서 3당 합당에 참여했고, 다시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돕기 위해 민주당에 입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 대선 때 신한국당에서 저지른 "경선 불복"에 대해서도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차라리 "경선 불복은 잘한 일이 아니다. 후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한다"라든가, "호남을 왕따 시킨 3당 합당에 합류한 걸 후회한다"라고 솔직히 말했다면 그 인기는 더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쪽도 그렇다. "이 총재가 100여평이 넘는 빌라를 소유해서 살면서 세 들었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민주당이 폭로했을 때, "1층, 3층도 빌려 쓰고 있는데 이유 불문하고 잘못됐다"고 모든 걸 까발려 대국민 사과를 했다면 인기도가 곤두박질치는 화근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손녀의 국적 문제만 해도 민주적 지도자를 자처한다면 주변에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단속을 해야함은 상식이 아닌가.
양당 후보가 누가 되든 상호 피나는 말싸움이 전개될 것이다. 거짓 말하고 교언영색, 빠져나가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변명하는 비상식 몰교양 후안무치가 쏟아 낼 말의 파편들이 선거판에 너절히 깔릴 것이다. 하기야 그런 버릇을 문제삼지 않고 "거짓말 한 게 그 자 뿐인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온 국민이나, 반짝 기록을 들출 뿐 물고늘어지는 근성이 태부족한 한국언론도 책임을 벗을 수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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