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멋진 경치 없다고 하지 마오. 단지 유랑객이 올라오지 않아서일 뿐. (...) 젊은 어부 다시 무릉도원을 찾아보지만, 이곳 말고 인간 세상 어디에 별천지 있으리오.”
주자학(성리학)의 창시자인 남송의 유학자 주희(1130~1200)는 중국 푸젠성 난핑시 우이산(한자 음독 ‘무이산’)의 수려한 풍광을 칠언시집 ‘무이구곡도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총길이 약 10㎞에 달하는 ‘아홉 굽이의 협곡(구곡)’이 우이산을 휘감아 흐르며 구간마다 산수화 같은 풍광이 펼쳐지고, 3,000여 종의 식물과 7,000여 종의 야생 동물이 서식하는 우이산의 천혜의 자연 환경은 그야말로 ‘생물다양성의 보고’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우이산의 매력을 이 한 가지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이산은 수려한 자연 풍광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최상품으로 꼽히는 ‘옌차(암차·巖茶)’의 발원지이자 최대 산지로 차 문화에서도 차지하는 위상이 높다. 주희의 고향이자 그가 40년간 저술을 하며 후학을 양성한 ‘성리학의 요람’으로도 꼽힌다. 고대 중국의 왕국인 민월(BC 306~BC 110) 문화의 발상지로, 역사적 가치도 충분하다.
        
        이처럼 우이산이 품은 입체적이고 풍성한 역사·문화·자연적 요소에 근거해 1999년 유네스코도 우이산을 ‘복합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복합문화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성을 모두 지닌 유산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전 세계에 40개(올해 4월 기준)만 존재한다. 중국 내에서 우이산을 수식할 때 ‘중국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 ‘중국 5대 국가공원’ ‘중국 10대 명산’ 같은 타이틀을 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우이산은 한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관광지이지만, 오히려 과거 성리학이 번성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번쯤 마음에 품었던 일종의 ‘버킷리스트’ 같은 곳이다. 주자의 학문을 흠모하고, 우이산의 수려한 경치를 흠모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무이구곡도가’를 본떠 자연을 예찬하는 한시·시조·가사 등을 지어 부르기까지 했을 정도다.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가 대표적이다.
■ 성리학의 성지에서 느끼는 ‘주자 문화’“동주(東周)에서 공자가 나왔고 남송(南宋)에 주자가 있으니, 중국의 고대 문화는 바로 태산과 우이산을 중심으로 한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차이상쓰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중국 문화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을 꼽을 때 전기에는 공자, 후기에는 주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13세기 초 중국을 넘어 한국에도 전파됐고, 조선이 이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생애 대부분을 우이산이 있는 푸젠성 북부에서 보냈는데, 오늘날 난핑시는 주희와 주자학을 또 하나의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올해 5월 초연된 대형 서사극 ‘월영무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우이산 풍경구 내 우이광장에 설치된 월영무이극장은 2,400㎡ 면적의 몰입형 실내 워터 무대를 갖추고 있다. 물을 이용한 무대 장치와 아이맥스급 영상 시스템을 도입, 음악·무용·희곡·시각 이미지·수상 무대 기술 등을 한데 융합해 주자의 철학과 우이산 문화를 70분간 압축해 보여주는 디지털 공연 프로젝트다. 첨단 기술을 통해 수묵화와 채색화의 동양적 미학이 섬세하게 재현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에서 최고안무감독을 맡았던 샤오샹룽이 총연출을 맡았다. 지난달 26일까지 198회 공연했고, 총관객수는 6만2,900명에 달한다.
공연은 사람의 안무와 최첨단 무대 기술을 활용해 ‘무이구곡도가’의 장면들을 재현한다. 산과 강이 흐르는 듯한 화면이 배경에 잔잔히 흩어지는가 하면, 왜가리 분장을 한 안무가들이 날개를 활짝 편 채 구름이 낀 바다를 가로지르는데 그들의 걸음마다 무대 위의 물이 찰랑인다. 달빛 아래 정자에서 주희가 “인생의 지혜를 얻는 길은 좋은 다기를 만드는 지난한 과정과 같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는 것을 시작으로, 그가 고난을 딛고 위대한 학자로 성장하는 서사를 담았다. 임종 직전 주희는 어린 시절 “하늘 위에 무엇이 있느냐”던 아버지의 질문을 떠올리며 격정적으로 외친다. “하늘 위에는 만물의 이치(理)가 있다. 하늘이 곧 이치이고, 내가 한평생 지켜온 것도 바로 이 이치다.”
    
    
    
    
    
극을 통해 주자의 일생을 엿봤다면, 실제 주희가 말년에 제자를 양성했던 ‘카오팅서원(고정서원)’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푸른 산에 둘러싸여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자리한 이 서원은, 1192년 주희가 설립한 작은 학교다. 처음에는 ‘죽림정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 뒤인 1244년, 송나라 황제가 직접 ‘고정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면서 이 명칭으로 불리게 됐다. 주희는 이곳에서 8년간 교편을 잡고 수많은 저서를 발표하며 성리학의 최종 체계를 완성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 하는 공간인 ‘도원당’은 말 그대로 ‘도의 근원, 학문의 뿌리’라는 뜻을 담은 일종의 교실이다. 아직도 수업이 이뤄지는 듯 낡은 나무 책상들이 열을 지어 배치돼 있고, 벽의 한가운데에는 주자의 친필 현판인 ‘문명기상(文明氣象)’이 걸려 있다. ‘기상’은 송대 성리학자들이 정신적 상태를 표현할 때 중요하게 쓴 개념으로, 이 학당에서 문명이 흥성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또 한가운데 ‘공자’ 초상화를 중심으로 공자의 제자들과 주자가 존경했던 학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서원의 가장 중심 건물인 ‘집성전’은 주자의 학문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안에는 주자와 그의 학문을 이어간 제자들의 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곳을 밝히고 있는 현판 ‘대유세택(큰 학자 주자의 학문이 대대로 은혜를 끼친다)’은 1705년 청나라 강희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다. 성리학은 조선시대 이황, 이이 등 성현에 의해 발전하면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만큼, 유학 연구자들을 비롯한 한국의 단체 관광객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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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핑·우이산=이혜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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