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국인의 주머니에는 방대한 정보와 끝없는 주의를 분산시키는 디지털 기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세계에도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 또 다른 기술은 바로 ‘도랑(ditch)’이었다. 오는 일요일, 이리 운하(Erie Canal)의 200번째 생일을 맞아 잔을 들어 축하할 만하다.
길이 363마일에 이르는 이리 운하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긴 운하가 27마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인간의 근육과 즉흥적인 재치로 이룬 위업이었다. 미국에는 18개의 수로교와 83개의 갑문을 만들어 총 675피트의 고도 차를 극복할 만큼 숙련된 기술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대니얼 워커 하우는 ‘신이 이루신 일: 1815~1848년 미국의 변혁’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우는 이 운하가 “국가 경제 통합의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사업이 연방 정부가 아닌 한 주의 손으로, 그것도 예정보다 2년 앞당겨, 예산 이하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1817년 7월4일 착공된 이리 운하는 뉴욕주를 ‘제국의 주(Empire State)’로 탈바꿈시켰다. 하우는 이 운하가 “인간의 창의력이 신이 만든 자연의 원형을 완성하고, 인류의 번영을 실현한 두 번째 창조”를 상징한다고 썼다.
이리 운하는 곧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화물의 두 배를 운송하게 됐다. 2톤의 짐마차를 끌 수 있는 말이나 노새 한 쌍은, 운하의 견인로 위에서 50톤의 짐을 실은 바지를 끌 수 있었다.
버펄로에서 허드슨 강이 흐르는 올버니까지, 폭 40피트·깊이 4피트의 운하를 따라 하루 평균 4마일 속도로 움직이는 운하는 뉴욕주 전역에 엄청난 사회 변화를 몰고 왔다. 로체스터, 시라큐스, 유티카 등지에서는 급격한 도시 성장이 종교적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뉴잉글랜드의 많은 농장은 이리 운하가 촉발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경제적·문화적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우의 표현대로 “미국인은 문해력과 기술 숙련도를 바탕으로 한 유동적이고 모험적인 민족”으로 변화를 환영했다. 롱아일랜드의 굴이 뉴욕 서부의 소도시 바타비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1850년에는 벽시계 한 개의 가격이 60달러에서 3달러로 떨어졌다. 하우는 “운송비 절감으로 인해 서양 문명에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전원에서 상업으로의 변화’가 뉴욕 서부에서는 단 한 세대 만에 압축되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리 운하는 대평원의 농부들을 동부 시장과 연결해 그들의 고립을 줄였고,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정착민들을 허드슨 강으로 이어줌으로써 뉴욕시를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하우의 기록에 따르면, 1824년 하루 동안 뉴욕 항에 정박한 배는 324척이었으나, 1836년에는 1,241척으로 늘었다. 이 항구를 통해 미국은 곡물과 함께 ‘혁명’을 수출했다.
1986년 버펄로에서 연설한 뉴욕주 상원의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은 19세기 미국으로의 대규모 이민 물결이 “철도가 중서부에 도달하면서 유럽으로 밀려 들어간 농산물 수출의 거대한 파도와 상당 부분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 역사학자의 계산을 인용했다. 미국의 농산물과 경쟁하면서 유럽, 특히 영국·덴마크·프로이센·러시아까지 이어진 지역에서 최소 30만 개의 농장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1869년에서 1887년 사이, 영국의 밀 재배 면적은 40%나 줄었다. 그 역사학자는 “북미의 소규모 자본가 농민들은 유럽 대륙의 혁명가들보다 훨씬 더 파괴적으로 유럽의 지배적 지주 계급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렸다”고 썼다.
운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이리호의 물 한 통을 뉴욕항에 부었다. 이를 ‘물의 결혼식’이라 불렀다. 당시 뉴욕시 인구의 절반인 10만 명이 운하 개통 축하 행사에 몰려들었는데, 이는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 하우는 “이리 운하는 ‘참여하는 정부’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후 철도가 운하의 중요성을 빠르게 대체했지만, 1849년 미국 정부는 운하 교통의 얕은 수로 통과를 돕는 발명품에 특허 6469호를 부여했다. 발명자는 일리노이주 샹가몬 카운티 출신의 전직 하원의원으로, 운하 개발을 통해 중부 일리노이의 발전을 꿈꾸었던 인물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그는 이리 운하가 미시시피강의 상업 활동을 대체하고 중서부 인구 성장을 자극하여 미국의 상업축을 남북에서 동서로 전환시킬 것임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북부의 경제적 활력을 키워 결국 앱포매톡스에서의 결말로 이어졌다. 정말, 대단한 ‘도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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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F· 윌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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