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골화한 ‘관세 제국주의’
▶ ‘미국만의’ 경제적 이익 추구
▶ 마음에 안 들면 ‘관세폭탄’
▶ 상대국 경제손실ㆍ정치 혼란
▶약탈ㆍ징벌적 무역 고착화
▶30년 이어온 WTO 체제 종식
▶ ‘트럼프 라운드’ 새 무역질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 행태는 말과 행동 모두가 ‘날것’ 그대로다.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 모든 판단의 근거임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가식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투명하지도 않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전망이 불투명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지켜보자”는 말로 이후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고, 아예 안면몰수식 말 바꾸기도 잦다. 트럼프의 이러한 행태는 그가 추구하는 보호무역 시스템이 심각한 후과를 가져올 것임을 예고한다.
무엇보다 국제 교역이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한 현시점에서 ‘미국의’ 경제적 이익 추구는 ‘미국만의’ 경제적 이익 추구로 변질됨으로써 무역이 ‘제로섬 게임’이 될 수 있다. 특히 상대가 주권국가인 외교 무대에서 ‘관세 제국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경제-안보를 연계하는 강압적·일방적 행태는 약탈적 무역시스템을 중층적으로 고착화할 수 있다.
■ ‘자유무역 80년’의 일방적 종언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7일(현지시간)자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세계무역기구(WTO)는 유명무실해졌다”며 “이제 우리는 새로운 ‘트럼프 라운드’를 목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5년부터 30년을 이어온 WTO 체제의 종식을 선언하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를 명명한 것이다. 길게 보면 1944년 미국 주도로 글로벌 경제질서 구축의 초석을 다진 브레튼우즈 협정과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결 이후 80년간 지속돼온 자유무역 체제를 일방적으로 부정한 셈이다.
그리어의 기고문은 그가 세계 최대 교역국인 미국의 무역정책을 총괄한다는 사실과 함께 시점 측면에서도 트럼프가 전 세계 교역국들에 부과한 상호관세의 발효 당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어는 미국 소비시장을 당근에, 미국이 교역국에 부과하는 관세를 채찍에 각각 비유했다.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소비시장에 진출하는 특권”을 누리려면 일정 수준의 관세를 감수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의중을 전한 것이다.
트럼프는 특히 그리어의 기고문을 통해 관세를 ‘전가의 보도’로 활용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고문에는 “미국의 새로운 접근 방식은 합의 이행을 모니터링하고 불이행 시 더 높은 관세를 신속하게 부과하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무역 상대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관세폭탄’을 던질 것이라는 경고다.
그리어는 미국이 WTO의 최대 피해자이고 중국이 최대 수혜자라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뒤 “미국은 불과 몇 달 만에 수년간 성과를 내지 못한 WTO보다 더 많은 해외시장 접근성을 확보했다”며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을 옹호했다. 지금의 다자간 자유무역 시스템을 결코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확인한 셈이다. 다만 WTO 체제의 무능과 비효율을 비난하면서는 트럼프가 WTO 분쟁해결기구의 위원 선임을 거부해 그 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사실은 외면했다.
■ 관세의 약탈적·징벌적 ‘무기화’트럼프가 교역 상대국들에 부과한 관세는 거의 예외 없이 해당 국가의 경제적 손실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협상’의 외피를 썼지만 약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트럼프는 일방적인 관세 부과와 이후의 협상 결과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이자 자신의 정치적 승리로 치장한다.
우리와 인접한 일본과 대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과의 양자 협상을 통해 상호관세율을 15%로 낮췄다고 안심하던 일본은 기존 관세율에 15%가 추가된다는 트럼프 측 해석에 큰 혼란에 빠졌다. TSMC의 미국 직접투자에 마음을 놓고 있던 대만도 경쟁국들보다 높은 상호관세율 20%에 비상등이 켜졌다. 특히 두 나라 모두 정국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일본에선 총리 교체설까지 나오고 있고, 대만에선 친미·독립 성향 여당이 사면초가에 몰렸다.
트럼프가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한 품목관세를 추가로 예고한 건 교역 상대국의 내부 사정이나 글로벌 공급망 혼란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며 ‘미국 내 생산’을 강제하는 것만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만 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에서 생산공장을 짓고 있어 크게 염려할 건 없다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국내 산업 생태계가 취약해지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더 심각한 건 트럼프가 정치적 이유로 ‘징벌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다. 그는 중국 견제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4개국 안보대화(Quad·쿼드)의 일원인 인도에 러시아 원유 수입을 이유로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브라질에는 극우파인 전직 대통령의 쿠데타 모의 혐의 기소가 인권침해라며 상호관세율을 50%까지 높였다. 캐나다 총리가 팔레스타인 독립국 승인 가능성을 언급하자 상호관세율을 35%로 올리기도 했다.
■ 혼란과 고통 수반할 ‘트럼프 라운드’그리어가 트럼프의 극단적인 보호무역 정책을 ‘트럼프 라운드’라고 명명한 건 새로운 글로벌 무역질서 구축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경우 관세폭탄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며, 결코 일방적이지도 약탈적이지도 않은 중립적인 정책 수단이다. 트럼프가 지난 4월 2일 상호관세 부과를 공식화한 이후 주요 교역국들과 진행한 협상을 굳이 과거의 다자간 무역협상에 빗대어 ‘라운드’라는 호칭을 붙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 체제가 안착되는 과정은 지난했다. 미국의 반대로 1948년 국제무역기구(ITO)의 출범이 좌초된 뒤 기존의 불완전 체제로 출범한 GATT는 제네바라운드(1947년)부터 우루과이라운드(1986~1994년)까지 8차례에 걸친 다자간 무역협상을 거치고서야 법적 구속력을 갖춘 WTO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다. 관세에 한정됐던 무역협상의 대상은 비관세장벽과 지적재산권, 농업, 분쟁해결 등으로 확대됐고, 지금의 WTO 체제는 글로벌 교역량의 98%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국제무역의 기준이 됐다.
트럼프는 3년 반 남은 임기 내에 어떤 식으로든 본인이 주창하는 ‘새로운’ 무역질서를 구축할 태세이지만, 현실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 적잖은 혼란과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다자무역 체제에 적응해온 개별 국가들이 무역 전략을 포함해 필요하다면 산업 생태계까지 바꿔야 할 텐데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비켜가기 어렵다.
게다가 미국의 일방통행식 무역 거래를 차용한 다층적 약탈 구조가 고착화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미국의 힘에 눌린 국가가 상대적 약소국과의 양자 협상에서 이를 벌충하기 위해 또 다른 힘의 논리를 들이밀 수 있다는 점에서다.
트럼프 이후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관세 중독’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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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대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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