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쉰들러와 노이트라(상), 유럽 출신 루돌프 쉰들러 LA 건축 세계에 알려
▶ 비엔나 대학 건축 전공 건축가 라이트에 영향받아
![[LA 유명 건축물 시리즈] 건축가 쉰들러 주택, 예술인들 사랑방 역할도 [LA 유명 건축물 시리즈] 건축가 쉰들러 주택, 예술인들 사랑방 역할도](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6/04/13/20160413105336571.jpg)
쉰들러 주택. 오른쪽 검은 부분이 쉰들러가 지내던 공간이고 의자 뒤로 보이는 하얀 부분이 그의 부인이 쓰던 공간이다. 두 공간이 만나는 부분의 옥상에 낮잠을 자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로스앤젤레스의 건축을 세계 건축계에 이름을 알린 최초의 건축가는 20세기 초의 루돌프 쉰들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에 다른 유명 건축가들도 있었지만 다들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만 활동했고 다른 곳에서는 인지도가 낮았다.
쉰들러는 미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생의 반을 보냈고 로스앤젤레스 건축을 세계 수준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축가이다. 이번에는 쉰들러와 그의 후배 노이트라에대해 살펴본다.
루돌프 쉰들러는 1887년생으로 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오스트리아비엔나 출신으로 비엔나 공과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이 학교는 한국의 유명 건축가 승효상이 수학했던곳이기도 하다. 쉰들러가 건축을 공부하던 20세기 초 비엔나는 ‘장식은 죄악이다’고 외치던 분리파(Secession)의 목소리에 한껏 힘이 실리던 시기였다. 분리파는 전에 언급한 예술 공예 운동이 발전하여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나타난 신예술 운동이다.
보수적인 전통에서 탈피해서 진실로 새로운 예술이 어떤 것인지 근본부터 탐구하던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프랭크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작품집이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이때 이를 접한 쉰들러는 라이트의 건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라이트에게 건축을 배우고 싶어서 1914년 혈혈단신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라이트의 상황이 좋지 않아 다른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쉰들러가 미국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적대 국가였고 결국에는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힘든시기를 겪어야 했다. 원래 쉰들러는 라이트에게서 얼마 동안 건축 경험을 쌓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고국에서자신의 건축 인생을 마무리할 생각이 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 때문에 고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계획을수정하여 미국에 눌러 앉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쉰들러는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난 뒤부터 꿈에 그리던 라이트 밑에서 건축 실무를 익히게 된다. 마침 라이트가 일하던 시카고는 당시 세계 최고의 건축 기술을 뽐내던 도시였다. 19세기말 대형화재로 도시가 완전 잿더미가 됐었고 여기에 새로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무렵 라이트는아주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일본 도쿄에 제국호텔을 설계하고 있었고 로스앤젤레스에 반즈돌 주택 설계도 동시에 진행해 가야했다. 라이트는 제국호텔에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다행히도같이 일하는 직원 중에 반즈돌 주택을 마무리할 사람으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유럽에서 온 젊은 청년,쉰들러였다.
라이트는 기본설계가 끝난 반즈돌주택의 실시설계와 현장 감리의 총책임자로 이제 겨우 30세가 된 쉰들러에게 맡기는 모험수를 던졌다. 사실 쉰들러는 외국인으로 영어도 상당히 서툴렀다고 전한다. 건축주는 당장 노발대발했다. 건축주 반즈돌은 당시의 석유 재벌 2세로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건축주가 아니었다.
최고의 주택을 짓고 싶어서 미국 최고의 건축가에게 의뢰를 했는데 건축가가 직접 마무리하지 않고 신참직원에게 지시한 것은 그녀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
이것은 단순히 주택 프로젝트 하나가 날아가는 게 아니라 그녀로부터 얻게 될 앞으로의 여러 프로젝트도 함께 날아갈 지도 모르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라이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쉰들러가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그의 끈질긴 설득과 그가 보여준 건축 열정은 라이트의 작품을 무리 없이 완성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덕에 그녀는 앞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쉰들러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가 아무 연고도 없는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쉰들러는 반즈돌 주택을 마무리하면서 라이트로부터 독립을 결정했다. 첫번째 프로젝트는 그의 자택이었다.
그냥 일반 주택이 아니다. 지금 봐도 상당히 실험적인 주택이다. 건축주가 쉰들러 부부 뿐 아니라 시공업자 체이스 부부, 이렇게 4명이었다. 각각의 건축주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해서 우선 부부별로 ㄴ자형 건물을 마련했다.
그리고 부엌과 기타 공용공간은 따로 ㄴ자형 건물을 만들어 3개의 건물을 바람개비처럼 결합했다. 부엌과차고는 공동으로 사용하게 독립된 공간을 마련했다. 각 사용자의 공간에는 라이트의 영향을 받아 벽난로가마련되어 있다.
벽난로는 실내 뿐 아니라 마당에도 마련하여 옥외에서의 삶도 고려하였다. 로스앤젤레스의 온화한 기후를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쉰들러 주택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라 주상 복합 건물이라고 할 수도있고 4개의 오피스텔 유닛을 잘 짜맞춘 건물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건물 덩어리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조경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상당히 세련된 그의 건축 재능을 느낄수 있다. 여기서 쉰들러는 남은 인생30년 정도를 보낸다.
쉰들러가 머물던 시기에는 쉰들러주택은 단순한 개인의 주택이라기보다는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겸했다. 연극배우, 음악가, 미술가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들의 관심 거리를 토론하고 발전시키는 곳으로서의 기능도 했다. 현재는 비엔나 응용예술 미술관(MAK)이 인수하여 쉰들러가 살던 당시의 문화 사랑방으로서의 기능을 계승하고 있다.
![[LA 유명 건축물 시리즈] 건축가 쉰들러 주택, 예술인들 사랑방 역할도 [LA 유명 건축물 시리즈] 건축가 쉰들러 주택, 예술인들 사랑방 역할도](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6/04/13/20160413105336572.jpg)
쉰들러 주택. 오른쪽 검은 부분이 쉰들러배치도. 체이스 부부는 북쪽에 출입구를 냈고 쉰들러 부부는 남쪽을 통해 출입한다. 부부마다 독립된 마당을 배치했다. 전체적으로 건물과 조경이 잘 짜여 있다.자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건축가 김태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geo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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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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