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원래 습지였던 곳을 개간해 농지로 만든 곳이어서 ‘물에 젖은 들판’이란 뜻의 ‘워털루’란 이름이 붙었다.
1214년 영국의 존 왕과 연합해 프랑스의 필립 왕을 공격하다 대패한 독일의 오토 황제가 싸웠던 부빈이 불과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다. 존 왕은 연합군이 이 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영국으로 건너가 다음 해 6월 15일 역시 ‘물에 젖은 들판’이란 뜻의 러니미드에서 역사적인 마그나 카르타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600년이 지난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러니미드에 못지않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다시 영국과 독일의 연합군과 맞붙었다 대패한 것이다.
일요일인 18일 하루 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미 이틀 전 리니 전투에서 겝하르트 폰 블뤼허가 이끄는 프러시아 군을 물리친 프랑스군은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을 연타, 영국 진영은 궤멸 일보직전에 이르렀다. 해질 무렵 승리를 확신한 나폴레옹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한 번도 전투에서 져 본 적이 없는 친위대를 마지막으로 투입했다.
그 순간 저 편에서 진격해 오는 군대의 모습이 보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요청한 원군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자신이 격퇴했다고 생각했던 프러시아 군대가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해 온 것이다.
다 이겼다고 자만에 차 있었던 프랑스 군 진영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자중지란 속에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웰링턴은 훗날 “일생에서 승부가 가장 아슬아슬했던 전투였다”고 적었다. 그와 함께 러시아에 쳐들어갔다 동장군에 참패한 후 엘바 섬으로 귀양 갔다 극적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나폴레옹의 계획도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났다.
아슬아슬하게 갈리긴 했지만 승패가 가져온 여파는 컸다. 이로써 나폴레옹 등장 후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프랑스의 전성시대는 끝나고 영국이 새 강자로 떠오르게 된다. 영국이 이 전투에서 이긴 1815년부터 제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를 ‘영국의 평화’(Pax Britannica)라 부르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온 세계를 누비며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해왔다. 10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국가 간의 큰 전쟁이 없었던 것은 많은 나라들이 영국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홍콩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영국의 문물과 제도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워털루에서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독일과의 연합군이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에 진 영국의 존 왕은 러니미드에서 마그나 카르타에 날인함으로써 영국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었고 그 후 600년 뒤 영국과 독일의 연합군은 부빈 인근 워털루에서 프랑스를 이김으로써 ‘영국의 평화’의 발판을 만들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이 이 경우에도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의 묘한 인연이 느껴진다.
지난 18일은 워털루 전투가 벌어진지 꼭 2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역사의 현장에서는 당시 군복을 입은 프랑스인들이 전투 장면을 재현하는 퍼포먼스가 있었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별 기념행사 없이 지나갔다. 아무리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진 일을 떠올리기는 싫었나 보다.
반면 영국 최고 공연장으로 꼽히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는 2주 전 워털루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 공연이 열렸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으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역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기쁨’ 합창으로 끝났다. 200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쁘긴 기쁜 모양이다. 역사는 결국 승자가 만들고 승자가 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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