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민들 삶의 중심이던 펍들 줄줄이 문 닫아
▶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상가로 아파트로 개발, 영국인들 맥주 소비량 줄어든 것도 한 원인, 2008년 재정위기 이후 7,000개 주점 사라져
런던의 멋진 주점, 올드 화이트 베어. 3세기의 역사를 가진 이 펍은 이달 초 문을 닫았다. 주민들이 펍을 지키려 애를 쓰지만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개발 의지가 확고해서 주점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영국 사람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펍, 동네주점이다. 저녁이면 으레 이웃 주민들이 모여서 맥주 한잔 앞에 놓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커뮤니티 센터 같은 곳인데, 시대가 바뀌면서 이들 동네주점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젊은 세대가 맥주를 전처럼 마시지 않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금싸라기 땅이 놀고 있는 것을 못 보는 것이다. 주점을 허물고 그 땅에 아파트나 샤핑센터를 지어 돈을 벌려는 욕심 때문에 영국의 전통 주점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런던에서 가장 멋쟁이 구역 중 하나인 햄스테드에서 펍(pub)이 하나 하나 사라지고 있다. 자갈로 포장된 운치있는 길을 따라 조지아 양식의 집들이 들어서있는 보석함처럼 예쁜 햄스테드에는 동네주점이 곳곳에 있었다. 그 중 하나인 ‘내그스 헤드’는 지금 부동산 중개업체 사무실이 되었다. ‘보헤미아의 왕’은 지금 옷 가게이다. ‘헤어 & 하운즈’ 자리에는 지금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경제가 변하고 취향이 바뀌면서 영국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 주점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 지난 20년간 대략 5개 중에 하나가 없어졌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지난 2008년 재정위기 이후 7,000개 동네주점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일부 작은 커뮤니티에서 주민들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겪고 있다. 동네주점 없이 사는 삶이다.
주점이 이렇게 급속도로 없어지자 정부도 보존에 발 벗고 나섰다. 동네주점을 ‘커뮤니티 가치의 자산’으로 지정하도록 지역주민들이 청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주점이 커뮤니티 자산으로 지정되면 함부로 철거할 수 없도록 건물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고, 커뮤니티 단체들이 주점을 매입함으로써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주점을 다른 용도로 쓰거나 허물어 버리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있다.
런던 남부에서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술집인 아이비 하우스가 지난 해 첫 커뮤니티 자산으로 지정을 받았고 그 뒤를 이어 300개 정도의 주점들에 대한 청원이 줄을 이었다.
“펍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국제적으로 독특합니다. 대단히 전통적인 것이지요.”
보수당의 브랜든 루이스 의원의 말이다. 그는 영국인의 삶에서 펍이 차지하는 비중을 중시하는 의회기구의 수장이다.
“많은 커뮤니티에서 펍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커뮤니티를 위해서, 지역 축구 클럽을 위해서, 댄스 클래스를 위해서, 엄마들의 아침 커피 모임을 위해서 기금 모금을 하는 핵심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영국은 지난해 3월 맥주 판매세를 핀트 당 1페니 인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펍은 과거 어느 때보다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실내 금연법이 흡연자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수퍼마켓에서 싼 값에 맥주를 파는 것도 펍 비즈니스를 갉아먹고 있다. 런던에서는 치솟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개발업자들이 주점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문화적 변화도 한몫을 한다. 영국 사람들의 맥주 소비량은 10년 전에 비해 23%가 줄었다고 영국 맥주 & 펍 협회는 밝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주점들은 맥주 외에 다른 음료들을 팔고 음식 메뉴를 늘리는 노력해왔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영국의 주점들이 겪는 어려움은 마가렛 대처 전 총리의 규제 철폐와 관련이 있다. 1980년대 대처의 노동당 정부는 주점들에 대한 양조장의 독점권을 없앴다. 그런데 그 결과 이들 양조장 대신 주점들을 차지한 것이 대기업들이고 이들이 전국의 주점의 절반 이상을 야금야금 차지하게 되었다. 소위 주점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많은 경우 주점 건물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고, 주점에서 어떤 맥주를 팔 지를 결정하며 임대료를 높이 책정할 수가 있다.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대형 주점기업들은 주점을 주점으로 운영하게 하는 대신 부동산으로 팔아버리면 당장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가 있다. 그래서 많은 주점들이 주거용 건물이나 수퍼마켓으로 바뀌고 있다.
햄스테드에서 주민들과 부동산 개발업자들 간에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주점은 ‘올드 화이트 베어’이다. 굴뚝이 두 개 솟은 멋진 빨간 벽돌 건물인 ‘베어’는 3세기 동안 이곳을 지켜온 이 거리의 명물이다.
들리는 말로는 피터 오툴이 한창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종종 이곳에서 남에게 업혀서 나갔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햄스테드에서 태어났고, 리처드 버튼은 이곳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커플도 이곳에 들리곤 했다고 한다. 요즘 손님으로는 보이 조지와 리엄 갤러거 등이 있다.
올드 화이트 베어를 부동산 개발그룹이 사들이자 이를 보존하기 위한 청원에 2,000명이 서명을 했다. 그 결과 베어는 커뮤니티 가치의 자산으로 천명되었고, 주점을 침실 6개 저택으로 바꾸려는 개발업자들의 건축허가 신청에 대해 지역 의회는 아직까지 거부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점은 지난 2일 문을 닫았다. 개발업자들이 건축허가를 얻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나서는 가운데 베어의 앞날을 불확실하기만 하다.
올드 화이트 베어의 오랜 단골인 기 윈게이트는 햄스테드에 다른 주점들이 있지만 베어는 이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다고 말한다.
“동네에서 심장을 떼어 버리는 것으로, 이제 우리는 좀비들처럼 모두 거리를 배회하거나 집안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다시는 못 만나거나 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올드 화이트 베어가 문 닫기 전 마지막 밤, 단골들은 모두 모여서 연설을 하고 건배를 했다. 애견과 함께 단골이었다는 한 여성은 상심이 크다고 했다. 인파가 이 방 저 방으로 몰려다닐 때 한 단골이 일어서서 올드 화이트 베어에 바치는 송사를 낭독했다.
“우리 모두 용감하고, 대담합시다. 화이트 올드 베어를 믿읍시다. 잔을 들고 함께 외칩시다, 오늘 우리는 문을 닫지만 언젠가 돌아오리라”
<뉴욕 타임스 - 본보 특약>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