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외파 전문의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꿈일뿐…
▶ 외국서 공부·수련의 마쳤어도 인정 안해 다시 시작해 개업면허 따는데 10년 걸려 자격 딴 후도 취업신분 못 얻으면‘물거품’
스리랑카에서 마취전문의로 활동했던 사지스 아베야위크라마(37)가 미국 의료면허 시험을 준비 중인 외국인 의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있다.
미국을 흔히‘기회의 땅’이라고 한다. 이 말은“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회 구성원에게 제도적으로 공평한 기회가 보장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특정집단이 구조적 불이익을 당하는 곳은‘기회의 땅’이 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수련의 과정을 마친 이민자 출신 전문의들에게 미국은‘기회의 땅’이 아니다. 오히려 박탈감을 강요하는‘배척의 땅’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의사는 제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개업을 할 수가 없다. 모국에서 힘들여 취득한 의료면허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개업의나 전공의가 되려면 족히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재훈련 프로그램에 투자해야 한다. 이미 한 번 치렀던 힘겨운 인증 절차를 차근차근 다시 밟아야 한다.
벌써 수년 전 해외에서 전문의 면허를 딴 베테런이라 해도 미국 라이선스를 손에 쥐려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시험을 치러야 하고, 살인적 인내력과 말과 같은 체력을 요구하는 수련의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미국의 의료계가 해외 면허를 인정하지 않는 주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수준 차이’다. 이들은 미국의 의료 수준은 질적인 면에서 세계 여타 지역과 맞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다고 자부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의사로 인정을 받으려면 재훈련을 통해 수준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논리다.
두 번째 이유는 해외 전문 의료 인력을 뽑아오는 것에 대한 ‘상도의 차원’의 거부감이다. 미국이 외국 전문의의 자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개업을 허용한다면 해외로부터의 ‘두뇌유출’ 현상을 부채질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당사국 현지의 의료 서비스 과부족 현상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외국인 의사들은 “자격검증 절차를 거치는 것은 좋지만 그 과정이 불필요한 시간소모를 요구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볼멘소리를 내지른다.
이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개혁법이 앞으로 수개월 내에 본격적으로 시행될 경우 미국의 의료 수요가 폭증하게 될 것이고 전문의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며 해외 의사에 대한 지나친 ‘견제’와 ‘구속’은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내륙지역은 이미 심각한 전문의 부족현상을 겪고 있다. 특히 1차 진료 분야의 인력이 형편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해외에서 훈련 받은 의료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바로 이 분야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의료개혁법으로 의료보험 가입 인구가 불어나게 되면 전문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할 것이 뻔하다.
이민 옹호론자들과 일부 경제학자들은 해외에서 훈련을 받은 전문의들을 활용할 경우 의료 노동인구를 신속히 늘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도 태생으로 낫소 유니버시티 메디칼센터의 정신의학 과장이자 미 의학협회에서 국제 의과대학원생 담당 위원회를 이끌었던 나야파티 라구 라오는 “이민자 의사들은 완전한 훈련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재교육을 위해 납세자들의 혈세를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도 ‘즉시 활용’이 가능한 고급 전문인력”이라며 “이들을 배제한다면 미국은 의료인 부족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미국에서 썩고 있는 해외 전문의의 사례는 너무도 많다. 그 중 한 명인 사지스 아베야위크라마(37)는 스리랑카에서 잘 나가던 마취전문의였다.
그러나 결혼을 위해 2010년 미국으로 들어온 그는 의료계의 허드레 일꾼으로 전락했다. 환자 진료기록을 병원의 전산 기록 시스템에 입력시키는 무보수직에 자원해 ‘울며 겨자 먹기’ 식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병원에 비비고 들어가 밥벌이 발판을 확보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최근 그는 자신처럼 의사 면허를 다시 취득하기 위해 ‘열공’ 중인 이민자 출신 의사들의 ‘재수 준비반’을 맡아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미국에서 배출된 의사의 수는 국내 의료 수요를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의료업계가 의과대학 정원을 제한한데 따른 결과였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의사 4명당 1명은 해외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중에는 본토 의대에 들어갈 수 없어 카리브해 지역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의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온 외국 의사는 제 아무리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제대로 훈련을 받았다 해도 개업을 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 비싼 경비를 들여 재훈련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은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족하다. 우선 비영리기구에 출신 대학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를 제출해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공인받은 다음에는 영어시험을 치러야 하고, 세 단계로 구성된 미국 의료 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미국 의료기관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맨 입으론 안 된다. 주로 병원이나 보건소, 의료연구기관에서 상당기간 자원봉사를 해야 겨우 추천장을 얻어낼 수 있다.
다음은 법적 신분이다. 어렵사리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해도 영주권이나 취업비자를 얻지 못하면 말짱 황이다. 대개 미국에서 재훈련을 받은 뒤 일단 자신의 출신국으로 돌아가 정식 비자발급 절차를 밟아 재입국해야 한다.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지만 이민자 의사에게는 특히 수련의 자리를 꿰차는 것이 최대 난제다.
영국과 일본 등 이른바 의료 선진국에서 이미 수련의 과정을 마친 전문의라 해도 미국에서 또다시 이 과정을 반복해야만 개업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수련의 훈련을 거친 경우에는 유일하게 예외가 인정된다.
주당 80시간의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수련의 과정은 의사들이 뒤돌아보기조차 싫어하는 ‘지옥훈련’이다.
무슨 실수를 저질렀거나 낙제를 한 것도 아닌데 버젓이 의사로 활동하다 출발선으로 되돌아가 악몽의 수련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그보다는 수련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다.
지난 5년간 수련의 프로그램에 신청서를 제출한 ‘해외파 의사’ 가운데 42.1%만이 자리를 찾은데 비해 미 주류 의과대학 본과 4학년생들의 93.9%가 같은 결과를 얻었다.
이런 모든 과정과 절차를 밟아 미국에서 의사로 공인을 받고, 개업자격을 얻을 때까지 거의 10년가량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의사 면허증을 포기하고 대신 널스 프랙티셔너(nurse practitioner), 혹은 보조의(physician assistant) 자격을 따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경우도 흔하다. 널스 프랙티셔너와 보조의는 의사와 간호사의 중간단계에 해당한다.
해외에서 전문의로 활동하던 사람들에겐 분명한 ‘신분 강등’이지만 이 역시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5년 정도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다. 이민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동일한 출발선을 기대했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다. 합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묵시적인 조건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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