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매입했던 맨하탄 32가 건물(25 W. 32 St.)
오늘날 200만이 넘는 대규모 커뮤니티를 구성한 재미 한인사회의 기초는 1965년 개정된 미국의 이민개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차별을 없앤 이민쿼터에 따라 70년대에 쏟아져 들어온 한인들의 이민물결로 그 양적팽창이 가능했던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당시 한국은 외환사정이 열악해 이민길에 오르는 사람들조차도 달러의 지참금을 수백달러로 제한할 정도의 각박한 상황이었다. 맨손으로 이민길에 올랐던 그때 그사람들이 대부분 미국정착에 성공한 오늘날의 한인사회를 보면서 그당시 가발이라는 아이템이 없었다면 참으로 고생들을 많이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가발은 정착초기 수많은 한인들의 생활수단이 되었고 또한편으로는 60년대와 70년대 초기 한국의 전략수출품으로서 수출액 1위를 차지한 효도상품이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뉴욕한인회장 시절의 장용호.
그런 의미에서 1962년 12월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 뉴욕무역관 장용호 부관장의 부임은 남다른 뜻을 지닌다. 미국에 한국산 가발의 전성기를 가져온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개설 초기 코트라 요원들의 주요임무 가운데 미국시장에 대한 조사업무가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다. 어떤 상품들이 어떤 국가들로 부터 수입해 들어오는가, 특히 일본이나 대만, 홍콩 등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은 우리도 잘하면 만들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그런 상품들에 대한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다. 백화점에 새로운 상품들이 선보이면 그자리서 견본을 구입해 본사로 보내는 일이 잦았다. 모조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창작을 가미해 신상품을 개발하게 되고, 그것을 들고 시장개척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본국 수출업자들을 바이어들에게 연결해주는 역할로 길 안내, 통역도 맡았다. 그때 장용호의 눈에 띠었던 점은 한국산 돈모와 인모가 미국에 수출되는 것이었다. 돈모는 한국돼지들의 털이 부드러워 브러쉬를 만드는 원료로 인기가 있었고 인모는 상류층 귀부인들이 애용하는 가발의 원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이었다. 부가가치가 없는 1차산업의 물자 수출이었다. 인모의 수입업자를 통해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발 제조공장과 연결된 그는 얼씬도 못하게 하던 사장을 설득해 공원들이 바늘로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캡에다 뜨는 제조과정을 지켜보게 되었고 "저런 수공업이라면 임금 싸고 손재주 좋은 한국인들이 더 잘 할텐데"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조인트 벤처를 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직접 제조공정을 익혀 두었다.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65년 7월 그는 서울 답십리에 콩나물 키우던 반지하 40평짜리 움집을 빌려 가발공장을 차렸다. 공원 30명으로 시작된 공장은 인모의 염색과정에서 한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첫해 2만달러어치 인모 가발을 수출할 수 있었다. 다음해에는 15만달러로 늘었고 때마침 일본에서 개발된 화학섬유 원사 카네칼론의 출현으로 인조 가발이 불티나듯 팔려나갔다. 판로는 주로 미국의 백화점들이었고 비슷한 시기 출발한 대니안(안인모)과 함께 미국시장을 휩쓸었다.
그의 이니셜을 딴 YH무역은 뉴욕지사를 통해 67년 50만달러, 68년 200만달러, 69년 470만달러, 그리고 70년엔 1,000만달러를 돌파하면서 그해 수출의 날 행사에서 철탑 산업훈장을 수상했다. 그는 서울 공장을 동서에게 맡기고 뉴욕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충북 옥천이 고향인 그는 1960년 7.29선거 때 고향에서 출마했다 낙선한 일이 있었다. 그로인해 재산을 날리고 미국회사의 한국지사에 근무하면서 발전기 구매를 위해 1961년 8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 와서 무언가 해야 되겠다"는 의욕이 생겼고 불과 5년만에 그 꿈을
이룰수 있었다.
뉴욕이 본거지가 된 그는 재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69년 제8대 한인회장에 당선됐다. 그때만 해도 한인 인구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부 초청을 받아 한국에 나갔을 때 초청측으로부터 박대통령의 3선개헌을 찬성해 달라는 은근한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던 일은 그가 한인회장의 본분을 지키려 노력한 결과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때 워싱턴 한인회장은 3선개헌 찬성을 공식 발표한 끝에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워싱턴 동포사회로부터는 불신임을 당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가발 선두주자 외에 장용호는 뉴욕 한인사회와 관련해 또다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3년 맨해튼 32가, 현 코리아타운 소재 6층짜리 상업건물(25 W. 32 St.)을 40만 달러에 매입해 이 지역 한인상권이 들어서는데 일조를 했던 기록이다. 뉴욕시내 최초의 상업건물을 매입한 한인으로 기록된다. 10년 후 이 건물은 삼성 계열사에 매각됐다가 브로드웨이약국 권오윤 사장의 소유를 거쳐 지금은 한아름 마켓이 들어있다.
그는 미국에 가발을 소개한 장본인이었지만 가발의 사양화를 누구보다 빨리, 정확히 예측해 품목을 바꾸는 상술도 보였다. 1971년, 한국에서 과잉생산되는 가발이 미국시장에서 과당경쟁으로 인해 가격이 떨어지고 있음을 간파한 그는 가발 제조에 쓰이던 미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의류제조로 선회했던 것. 주로 남성용 바지와 재킷, 스프링코트를 만들어 미국시장에 내놨다. 그의 예측대로 가발은 74년 초부터 사양길에 들어섰고 그는 75년에 가발을 접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79년 서울에서 발생한 ‘YH무역 여공 농성사건’이었다. 노조가 결성되어 활동 개시와 동시에 YH가 폐업을 공고하자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 운영의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몰려가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경찰이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공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외화유출의 비난을 받았던 그는 자신은 미국에 베이스를 두고 비즈니스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투자를 한 셈이었다고 항변했다. 또한 YH는 노조를 주도한 도시산업선교회의 희생물이었으며 경찰이 강경진압하는 단계에서 희생자가 난 것이라고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이미 사건은 정치적으로 확대된 후였다. 한동안 오명에 시달린 그는 80년대를 조용히 보내면서 뉴욕에서 몇가지 활동을 벌였다. 봉사센터, 한국학교를 돕는 일에 나서는 한편 국내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데려와 롱아일랜드 노스쇼어병원에서 무료로 수술해 주는 새생명재단의 일원으로 봉사했다. 미국 민주당을 후원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90년대 들어 자녀들의 거주지역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살고 있는 그는 한마디로 풍운아적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부인(김순경)과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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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자기 잘못은 인정안하고 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