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 딛고 다시 무대오른 영원한 메트의 디바
전세계를 무대로 더 큰 날개를 펼칠 준비를 마친 홍혜경
홍혜경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아름다운 감정과 슬픈 감정이 동시에 떠오른다. 1982년 한인최초로 메트 오디션에 우승한 이래 1984년 데뷔, 26년이상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로 활동하는 홍혜경. 그는 한인사회도 잊지 않고 종종 기품있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가슴아픈 가정사를 치른 후 칩거생활을 거쳐 다시 무대에 선 그를 베이사이드에서 만났다.
▲철저한 자기관리
“그동안 꾸준히 메트 무대에 섰고 럭키 했다. 이 모든 것은 가족,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 무대, 지휘자를 지닌 메트의 덕분이다. 막내아들이 이번에 대학조기입학 원서를 마감하고 갈 대학이 정해지면 아이들 뒷바라지에서 해방된다. 1983년 첫딸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아이 셋을 낳고 키워서 이제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이다”두 딸은 이미 대학졸업 후 제 갈 길을 가고 있고 늦둥이 아들만 대학에 가면 홍혜경은 세계 각 국의 어느 무대라도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뉴욕 메트 공연을 하면서 유럽 지역의 초청이 와도 가장 중요한 이태리 밀라노 라 스칼라나 비엔나, 파리, 뮌헨 등지의 주요 오페라 무대만 갔고 그외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해외 공연은 거절을 했었다. 인물도 뛰어난데다 풍부한 성량, 서정적인 음색의 소프라노 홍혜경의 존재는 오페라 무대에서
독보적이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따뜻하고 우아한 미성을 지닌 그는 평소 자기관리를 잘해왔다. 공연을 앞두고는 목소리를 아끼느라 말을 잘 안하고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생전의 남편이 철저하게 관리 해 주었다.
“나의 모든 공연에는 남편이 왔다. 다른 사람이 하는 공연은 안보았다. 내가 출연하는 오페라는 몇 번이고 보았다. 같은 것 또 보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하면 노우, 그는 내 공연을 너무 즐겼다. 그가 희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그가 옆에 없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24세에 한인교회에서 만난 남편 한석종씨는 오랜세월을 함께 하다가 2007년 12월 암 선고를 받고 2008년 7월 세상을 떠났다. 한석종씨는 아내가 출연하는 오페라의 줄거리와 맡은 역에 대한 연구는 물론 역사적 배경까지 모두 공부해 홍혜경에게 일러주었다. ‘라보엠의 미미 역을 하려면 보헤미안의 삶을 알아야 해’, 그의 박학다식함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고 홍혜경은 남편이 찾아준 자료를 보고 공부했고 열심히 맡은 역을 소화했다.
유펜과 컬럼비아대학원을 나온 남편은 한인 변호사로서 뉴욕한인변호사협회와 제주도민회 회장으로 활동했었고 자연히 아내도 한인관련 행사에 협조하는 일이 잦았다. 지난 9일에는 뉴저지 뉴오버펙 공원에서 열린 추석맞이 대잔치와 대한민국 UN가입 20주년기념 KBS 뉴욕 코리아페스티벌 무대에 서기도 했다.
▲내가 맡은 역 다 좋아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무대의상을 벗기 시작한다. 분장실에 늘 제일먼저 도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빨리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다.” 평소 메트 리허설룸과 베이사이드 집에서 연습을 하는데 오페라가 시작되기 1주일전부터는 오전10시부터 오후6시까지 총연습을 한다.
25세에 메트에 데뷔한 이래 200회가 넘는 공연을 하며 명실공히 메트의 디바로 활동해온 홍혜경, 그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안드레아 보첼리와의 무대에서도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40개 이상의 배역을 맡았지만 최근 ‘라보엠’의 미미,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투란도트’의 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또는 백작부인 등으로 활기차게 때로 애절하게 무대를 종횡무진 했다.
“내가 맡은 이 역들을 다 좋아한다. 내 목소리는 ‘마농’의 마농역에 맞다. ‘토스카’의 토스카나 ‘나비부인’의 쵸쵸상은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홍혜경은 자신의 목청과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역이라도 사양한다. 앞으로는 해보고 싶은 역이 있다. “러시아 오페라 차이코프스키의 ‘유진 오네긴’ 중 시골처녀 타티아나역과 ‘돈 죠반니’의 소프라노 귀족 여자인 돈나 안나역에 도전하고 싶다”그야말로 세월과 경륜이 무르녹은 목소리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들은 실력이 뛰어난 소프라노가 해야 한다. 그만큼 훌륭하나 어렵다.감미로운 노래만큼이나 멋진 연기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있는 홍혜경은 “연기가 재미있다”고 한다. 줄리아드 액팅 클래스에서 공부도 했다.
▲아픔을 이긴 노래
늘 칭찬과 찬사 속에서 노래하던 홍혜경은 남편이 54세로 사망한 후 2년 동안 노래를 잊은 적이 있다.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가 없었다. 병원도 같이 가고 치료 중 모든 시간을 함께 하던 남편이 사라진 후 그동안 바쁘게 살던 무대가 허상으로 보였던 것.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고 딴 사람이 되어 연기를 하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나만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나 했다. 더 이상 노래를 할 수가 없었다.”예정된 공연을 모두 취소하고 칩거에 들어간 홍혜경은 평소 남편이 돌봐주던 16세 아들을 아침에 깨워 학교에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아무리 주위에서 노래를 하라고 해도 전혀 귀담아듣지 않은 그는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그러다가 2009년 메트측에서 3년간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하는 영 아티스트 장학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계속 권해 왔다.
“메트에 나가 가르치고 시범을 보이려고 노래하면서 기쁨이 왔다. 노래하는 즐거움을 찾았다. 노래를 안하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리고 홍혜경은 2010년 4월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역으로 메트로 돌아왔다. 올 1월에는 ‘카르멘’의 미카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을 했고 그리고 오는 11월 18, 22일 ‘라보엠’에서 가난한 시인 루돌프를 사랑하는 미미로 출연한다.무대 위의 삶과 무대 밖의 삶을 잘 구분하여 살며 인생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지금, 그녀는 삶의 아픔을 딛고 편한 마음으로 노래한다. “좋은 연주, 정말 잘하는 연주를 하고싶다”며.
▲노래는 언제부터?
1959년 비즈니스맨인 아버지와 음악선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강원도에서 태어난 홍혜경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한국에 온 선교사가 외할아버지에게 선물한 오르간을 가지고 놀면서 음악에 대한 재능을 키웠다. 외할아버지는 광주에서 창립된 장로교회 설립자였다.예원중학교 시절 미 줄리아드 예비학교 전체 장학금을 받고 유학와서 줄리아드 음악원을 거쳐 한발 한발 걸어온 것이 메트의 프리마 돈나로 군림하게 했지만 고국을 떠난 그리움은 항시 남았다. 그래서 모국어와 우리 정서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2003년 EMI사에서 ‘그리운 금강산’, ‘보리밭’, ‘가고파’ 등이 담긴 한국 가곡집을 최초로 전 세계 동시 발매했다.
자녀양육의 책임에서 벗어나 목소리로, 가르침으로 전세계를 무대로 더 큰 날개를 펼칠 홍혜경, 그는 크고 작은 무대를 가리지 않고 관객이 본 생애 최고의 무대를 선사할 준비를 마쳤다.그와의 한시간 남짓한 만남동안 따뜻한 진심이 전해져 왔다. 그래서 홍혜경의 노래는 관객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모양이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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