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초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국보 미국순회 전시회 개막식에서 남궁염 총영사 부부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국 도자기를 선물했다.
독립운동가 남궁억 외아들로 이승만과 함께 구미위원부 활동
이승만 특명으로 총영사에 임명, 당시 구입공관 현 총영사 관저
한국정부가 초대 뉴욕총영사를 역임한 남궁염씨의 미국내 후손들을 수소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뒤늦게 해외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은 남궁염씨의 직계 후손들이 한국에는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60년 4.19가 날 때까지 12년간 최장수 뉴욕총영사를 지낸 남궁염씨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해방 전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 또는 초창기 유학생들에게나 기억될 수 있는 인물이다. 1907년 미국에 유학,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측근으로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계속 미국에 살다가 타계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료는 외무부에도 아주 빈약할 정도로 남아있다. 붓글씨로 쓴 이력서뿐이고 유가족들도 미국에 흩어져 조용히 살았기 때문에 한인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필자는 여러 해 동안 그의 유가족들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1984년 6월에서야 노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던 그의 미망인, 막내아들과 접촉이 이루어져 그에 관한 자료를 겨우 얻을 수 있었고 이후로 그들과의 연락은 끊긴 상태이다.
84년 당시 부인 우복자 여사(85세)와의 전화 통화로 취재한 남궁염씨의 직계자손은 2남1녀 3명이었다. 장남 준은 당시 60세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고 딸 혜원(54)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의 카운슬러로 있었다.
막내아들 진은 미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있으면서 당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은퇴한 후 어디론가 이사를 했다. 사후 50년만에 독립운동 유공자가 된 것을 계기로 돌아본 남궁염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진을 보면 약간 긴 얼굴에 콧수염을 길러 위엄이 풍기는 인상의 남궁염은 한말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언론인(황성신문)이었던 남궁억의 외아들이자 3대독자로 1888년 3월17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한글을 깨우친 후 배재학당에서 영어 공부를 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해 일본에 체재하던 박영효의 도움으로 미국여행권을 취득했다. 1907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나 정착에 어려움을 겪으며 버지니아로 흘러들어와 고학으로 랜돌프 매건 대학을 졸업했다.
교수의 추천으로 은행에 취직이 되었을 때 마침 워싱턴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구성하고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승만과 극적인 상봉을 했다. 남궁억의 외아들이라고 하자 이승만은 반색했다. 둘은 독립협회 시절 절친한 친구사이로 감옥생활도 함께 했던 옥중동지. 그때부터 남궁염은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구미위원부 활동을 도왔다. 낮에는 은행 근무를 하고 밤에는 구미위원부에 나가 재무 일을 맡았다. 이때 함께 일했던 인사들은 정한경, 신영호, 이용직 등. 그중 정한경은 남궁염이 초대 뉴욕총영사로 임명될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임명되어 함께 신생정부의 외교관 생활을 했다.
David Y. Namkoong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활약한 남궁염은 1924년 8월20일 뉴욕한인교회에서 부인 우복자(미국명 조앤)와 결혼식을 올렸다. 우처녀의 아버지 우흥태가 이승만과 YMCA때부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결혼식에서 신부는 이승만의 손에 이끌려 입장했다. 1926년 뉴욕에 이승만계 동지회가 설립될 당시 남궁염은 이승만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주선소(직업소개소)를 운영하기도 했고 향수 도매를 한 적도 있었다.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 3,1신보가 뉴욕에서 발행되고 있을 때 그는 자녀들까지 동원해 발송 역할을 했다. 사장이던 허정이 워싱턴으로 가고 이기붕이 대신 운영을 맡아 하던 시기였다.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제일 먼저 뉴욕에 생긴 공관은 뉴욕총영사관이었다.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4월1일을 기해 총영사관이 업무를 시작했고 초대 총영사에는 이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남궁염이 임명됐다. 남궁염은 그때 마침 뉴욕에 와있던 이순용(전 내무장관)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하나 얻어 공관 준비를 하다가 본국정부와 상의 끝에 맨하탄에 건물 하나를 물색하게 됐다. 9 E. 80가로 부근에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구겐하임박물관 등이 있어 위치가 좋았고 공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4층 건물로 당시 시세로는 아주 싼 값에 매입했다고 한다. 지하실은 식당, 1,2층은 사무실, 3,4층은 사저로 개수를 마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해외공관 경비를 최소한 줄여 쓰라는 외무부 훈령에 따라 가구도 변변히 구입하지 못했다.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가구들을 임시로 사용했고 청소비를 절약하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려 남이 안볼 때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청소를 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현재 뉴욕총영사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참전한 미군 병사들이 하나둘 전사하자 그 가족을 찾아가 위로하
는 일도 잦았고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구호물자 수송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쟁으로 인해 미국내에 코리아가 많이 알려질 때였으므로 여러군데 초청을 받아 연설하는 일도 잦았다. 총영사관 업무가 늘어남에 따라 부영사로 최용진(최호진 교수의 형)이 부임했고 고용원도 늘었다. 뉴욕근무 12년동안 남궁총영사는 자가용 승용차가 없었다. 본국정부의 지시대로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그의 관직은 이승만 대통령과 궤를 같이 했다. 4.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하자 그역시 뉴욕에서 사의를 표하고 롱아일랜드에 조그만 집 한채를 사서 나갔다고 미망인은 전했다. 관직을 버린 남궁염은 그후 약 1년간 롱아일랜드에서 요양했으나 워낙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61년 11월29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바로 전해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심장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던 때여서 찾아가 보지도 못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74년에야 환국할 수 있었다. 강원도 홍천 선영에 뒤늦게 묻혔다. 남궁염의 두아들은 모두 미국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국내에는 뿌리가 없어진 셈이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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