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그림으로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다부진 결심 하나로 단신 뉴욕에 온 이일씨. 뉴욕의 밑바닥 직업을 모두 거쳐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오랫동안 그림이 팔리지 않는 역경을 딛고 드디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그의 그림이 걸렸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본다.
▲작품은 시간과의 싸움
십여년 전,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가난한 친정의 소탈하고 무던한 성격의 오라비 같은 분위기였다. ‘이 사람이 화가?’ 다 낡은 청바지에 올 굵은 스웨터 차림의 이일(59)씨는 페인트 칠 하다가 온 노무자 같았지만 어떤 질문을 ‘다다다다’ 총알처럼 해대어도 다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보고서 아하 하고 이해했다.초심을 잃지 않고 노무자처럼 온몸을 사용하여 끈기있게 작업하는구나, 뜨거운 열정으로 지치지도 않고 수십년 간 그림을 그려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선 하나를 무수히 겹치고 겹쳐 면이 되고, 단순명료한 면 한구석에 여백이 있는 그의 볼펜 추상화 앞에 서면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진 절묘한 조화를, 그래서 생성된 거대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작품 하나에 400~500자루의 볼펜이 들 정도로 긴 시간과의 싸움, 이는 바로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이일씨는 번번이 싸움에서 이겨낸다. 그리고 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0.5~0.7mm 볼펜촉으로 무수한 선을 그어 이루는 200호작품이 마무리까지 2~3개월, 개인전에 사용되는 볼펜은 몇 가마니다.
▲왜 볼펜인가?
이일씨가 볼펜추상화를 해온지 30년,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뮤지엄, 텍사스주 크로우 컬렉션 미술관을 거쳐서 지난해 11월 23일부터 올 3월27일까지 메트뮤지엄 2층 한국관에 볼펜추상화와 아크릴릭& 오일화 2점 전시를 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을까?
“초기에는 못으로도 그리고 이것저것 해보다가 자기 목소리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볼펜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가장 가까운 도구임에 착안했다. 가장 현대적 소모용품 볼펜으로 작품을 해놓고 보니 사람들은 아, 이게 볼펜이었어 하고 놀라더라.”1981년 브루클린 미술관 전시회에 볼펜화를 선보인 후, 25년간 블랙 볼펜으로, 5년전부터 블루도 사용했다.“대학시절 스승이 무채색을 주로 써서 색깔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밝은 레드는 나와
상관없는 줄 알았는데 조금씩 넣어보니 좋다. 2년전부터 칼라펜슬을 쓰고 있다.”고 한다.97년 API(Art Projects International. 대표 이정옥)에서 첫 개인전을 하며 전속화가로 인연을 맺은 것이 더욱 날개를 달았다. API는 세계각국 갤러리와 뮤지엄 등에 이일씨의 자료를 보내고 전시회를 주선하고 작품판매를 한다. 2004년, 2008년 미국미술대학 교과서 “Drawing”에 이일씨의 볼펜화가 실리기도 했다.
▲화가로 승부를 걸겠다
이일씨가 미국에 온 것은 77년, 말그대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청운의 꿈을 품고서였다.“홍익대 4학년때 전 가족이 73년 LA로 이민을 가면서 잠시 같이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졸업을 했다. 당시 한국 미대생들에게 파리보다는 뉴욕 바람이 불었다. 화가로 승부를 걸겠다는 결심 하나로 뉴욕에 왔다. 1주일간 YMCA 숙소에서 머물다가 13가에 가장 싼 스튜디오를 한달 150달러에 빌렸다.”미군부대 요리사인 아버지는 5형제 중 둘째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니 적극 응원을 해주었다. 선배인 김차섭, 김명희 화가부부가 그를 프랫 인스티튜트에 데리고 가 입학 서류 준비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이때부터 3년간 그는 공부하랴, 돈 벌랴 온갖 고생을 다했다. 신발가게, 옷가게, 가발도매상, 조명가게 등의 세일즈맨, 점원, 창고지기, 이삿짐센터 용역일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84년 홍대 회화과 동문으로 뉴욕대대학원에서 판화공부 하던 이수임씨와 결혼, 가장 역할도 해야 했다. 브로드웨이와 캐널 스트릿 길가에 전깃줄을 걸어놓고 블라우스도 팔았다.브루클린 다리 밑 창고에 화가들끼리 모여 살았는데 여름이면 낚시를 할 정도로 전망은 좋았지만 한겨울에는 냉골에서 살아야 했다. 생각다 못해 창고 안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았다.
▲소비의 천국이라는데
“소비의 천국 뉴욕에 와서 소자는 시옷도 못꺼낼 정도로 내핍생활을 해야했다. 아이 둘이 태어났는데 맥도널드 앞에서는 걸음을 빨리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먹고 살아야 하니 똥차를 하나 사서 프리마켓을 시작, 옷을 팔아 종자돈을 모아 가게 자리를 마련했다.”먹고 사는 중에도 이일씨는 볼펜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같이 그림 하는 아내가 작업실이 없는 것이 미안했다고.
86년 브루클린 그린 포인트 지역에 빈 가게가 났는데 렌트와 비슷했다. 내부를 직접 페인트 칠해 단장 후 가게를 열었는데 마침 이스터 시즌이라 호황을 이뤘다. 3년간 옷 장사후 그린 포인트에 4층 건물을 헐값으로 샀다. 그것이 지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헐값으로 산 건물이 맨하탄과 가깝다보니 젊은층에게 각광 받으면서 지금은 반은 렌트 주고 나머지 반은 화실과 집으로 사용한다.
“평소 아내에게 그림은 스페이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계속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몇 년 전부터 4층에 아내의 화실을 마련했다.”는 그는 매일 6시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부부가 이스트 리버 강변으로 나가 45분정도 조깅을 한다. 아무리 춥고 더워도 간다. 시원한 강바람을 쐬고 돌아와 간단한 아침을 먹은 후 이일씨는 1층, 이수임은 4층으로 각자 화실을 찾아 사라졌다가 점심시간이면 만나서 식사를 하고 다시 헤어진다.
오후 7시경에 다시 만나 저녁을 먹으며 와인 한 잔을 기울이는 부부, 착하게 자란 두아들도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긴다.“가장 싼 와인도 즐겁게 마셔요.” 화목한 가정이 뒷받침되어선지 그의 그림에서는 깊은 안식의 바다, 등을 기댈 언덕 같은 부드러운 안정감이, 여명과 희망이 느껴진다.
▲다음엔 뭔가
이른바 성공한 화가인 이일씨는 “또 어느 산을 넘어야 하나, 이것 다음엔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데 최근 그는 다 쓴 볼펜의 심으로 배경의 코팅을 벗겨내는 작품을 발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하루 10시간 꼬박 스튜디오에서 땅방울을 흘리는 중노동자처럼 일하고 늘 에너지 가득한 변화무쌍한 작품을 창조해 내는 그는 먹고 사는 일에 해방되었다지만 여전히 가난하나 우애 좋은
친정 오라비 분위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찾는 지도 모른다.
<민병임 논설위원>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한국관에 전시된 이일씨 작품. 4일 오후6시 작가와의 갤러리 토크가 열린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